이 눈물 치트키 영상은 김혜자님이 2019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대상을 받고 수상소감으로 그 드라마의 엔딩 내레이션을 낭독하는 영상이다.
내가 이 수상 소감을 처음 접했던 것은 영상이 아니라 '텍스트'였다.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안에서 연예 뉴스 기사를 뒤적거리다가 김혜자의 수상 소식과 수상 소감으로 이 엔딩 내레이션을낭독했다는 기사를 봤고, 그 기사에 내레이션 전문이 실려 있었다. 근데 텍스트만 보고도 눈물이 솟았고, 나는 눈물이 나면 콧물도 함께 나는 편이다. 2019년 어느 지하철 2호선 출근길에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30대 후반 아줌마는 남들을 매우 당황케 할 수 있으므로(일단 나부터 당황스러웠다), 추가로 수상소감 영상까지 찾아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도대체 눈이 부시게는 어떤 드라마인가' 싶어 드라마 기본 정보를 찾아보았다. 네이버 메인에 소개된 기본 줄거리만 봤는데 느낌이 왔다. 이건 내 인생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걸 몇줄의 요약 줄거리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기가 무서웠다. 나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무섭게 빠져드는 스타일이다. 잠도 안 자고, 해야 할 일도 놓아버리고 몇시간씩 계속 드라마만 본다. 그래서 눈이 부시게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회사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였고, 주말에는 아직 어린아이들 육아에 집중해야 해서, 이 드라마를 보면 당분간 내 일상은 무너진다는 예감에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루다가 2021년 어느 봄에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애들도 좀 크고 회사도 안정되기 시작해 마음에 여유가 약간 생겼었나 보다. 그래도 드라마 보느라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싫어서, 하루에 한 편 이상 보지 않기로 다짐하고 드라마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내 취향에 딱 맞는 드라마였다. 남은 회차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몰아치기는 커녕 조금씩 아껴서 보게 될 정도였다. 주로 출퇴근길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드라마를 봤는데, 보다가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재생을 중단하고 한템포 쉬어 갔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 드디어 마지막회 12회에 이르러서는 직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회는 대중교통 안에서 보면 안되겠다. 자제할 수 없는 눈물로 다른 승객들에게 혼란과 불편을 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회는 특별히 집에서 보았다. 그리고 수상소감으로만 접했던 엔딩 내레이션을 진짜 드라마 엔딩에서 다시 접했다. 수상소감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앞의 내용을 전혀 모르던 남편이 마지막회 뒷부분을 잠깐 같이 봤는데, 모르고 봐도 배우들 연기에 가슴이 좀 먹먹해진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눈이 부시게'는 내 인생 드라마 베스트 3위에 들어왔다. 드라마가 너무 좋았는데, 너무 좋으니까 오히려 왜 좋은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어디에도 후기를 쓸 수 없었다. 그렇게 후기를 써야지 써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가, 엊그제 유튜브에서 김혜자님 인터뷰를 보고, 오랜만에 엔딩 내레이션을 다시 찾아보았다. 내레이션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또 눈물이 퐁퐁 샘솟았다. 남편이 '가정폭력 피해자로 보일 수 있으니 밖에서 울지 말라'라고 했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휴지가 있어서 콧물을 닦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내레이션의 어느 부분에 특히 취약한지도 알 수 있었다. 도입부였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김혜자님의 진솔하고 떨림 있는 목소리는 이 내레이션을 완벽하게 살린다.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다"는 부분에서 내 마음은 어김 없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내 주변을 스쳐간 많은 사람들의 지난 삶이 순식간에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마음이 저릿하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살아서 좋으셨을 것 같고, 아직 살아계시는 우리 외할머니도 살아서 좋았던 순간이 많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도. 또 나도.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심지어 지구의 수명에도 끝이 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 언젠가는 없어질 우리별.
이런 한계 속에서 왜 태어나고 왜 살아가는가. 내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언젠가 소멸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언제 어떻게 소멸하려나.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마음이 아득해지곤 한다. 어릴 때는 자려고 누웠을 때 이런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하면 너무 무서워져서 옆에 누운 엄마에게 말없이 엉겨붙곤 했다.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 건 아니지만, 잠재된 의식 속에 끝없이 맴돌고 있는 질문이다. 그 잠재의식을 저 내레이션이 건드린다. "그래도 지금 살고 있어서 좋다"라고.
그리고 "살아서 좋았다"는 말은 다른 슬픈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언젠가는 살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처럼. 드라마 주인공 혜자처럼. 나날이 쇠약해지시는 외할머니도. 아직 건강한 우리 엄마도. 그리고 나도.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도.
그게 너무 슬퍼서 내레이션의 이 부분에는 어김없이 눈물이 퐁퐁 솟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