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는지 기억해 두려고 일부러 저장해둔 것이다. 요즘도 글쓰기에 앞서 소재가 고민될 때, 가끔씩 메모장을 꺼내 첫 다짐을 읽어본다.
홀가분한 삶을 지향하고 노력하지만 별로 홀가분하지 못한 직업과 육아에 치여 좌절하고 나태해졌다가 다시 노력하기를 반복합니다.
제 가장 소중한 자산은 돈보다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의 시간을 더욱 소중히 사용하고 홀가분한 삶에 한 발짝씩 다가가기 위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글쓰기를 마음먹었을 때, 나는 스스로의 지향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홀가분한 삶을 꿈꾼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홀가분함과 거리가 먼직업과 육아였다.
브런치를 시작할 때 다짐한대로 홀가분한 삶에 한 발짝씩 다가가기 위해 얼마 전에 스스로 급여를 낮추고 일을 줄였다. (글쓰기의 힘은 대단하다. 막연히 생각만 할 때와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것의 효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육아는 일처럼 마음대로 그만두거나 줄일 수가 없다. 퇴사라는 말은 있지만, 육아를 종료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없지 않은가. (흔히 쓰는 '육퇴'는 퇴근일 뿐, 다음날에 또 육아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
나는 타인에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인데, 애들에게는 하도 화를 많이 내서 새해 다짐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않기'다. 부끄러운 목표다. 부끄럽지만 현실적인 목표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편이라 자부하는데,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짐작컨대, 아이들로 인해 심신의 피로감이 극에 달할 때 내 언행이 날카로워졌고, 아이들의 행동이 내 기준치를 심하게 벗어날 때 화를 내게 되는 것 같았다. 원래도 육아에 열과 성을 다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나를 위해 더 내려놓고 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육아 목표를 '아이들의 자립'으로 정하고, 삶을 단단하게 해줄 '기본 생활 습관'을 들이는 것에만 신경쓰고 그 외에는 좀 내려놓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나는 '기본'의 기준이 남들보다 좀 높은 편인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결과보다는 '태도'와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숙제로 나온 문제를 다 맞히더라도, 숙제하는 태도가 별로이면 그걸 지적하고 바로잡아줘야 직성이 풀린다. (문제를 틀리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
이런 걸 냉장고 옆에 붙여놓고 스스로와 아이들에게 환기시킨다. 원래 5개 항목이었는데, 붙이고 나서 2개 항목이 추가되었다. 종이칸이 모자라서 다행이다.
'기본'에 대한 높은 기준, '자세'와 '태도'를 중시하는 육아 방침은 자주 첫째 아들과 충돌한다. 아들은 성격이 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이 강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편이고, 지적을 당하면 일부러 더 한다. 그리고 남을 탓한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급하게 뛰어가다가 안전바에 부딪혀 넘어지고는 아프다고 울면서 "이거 만든 사람 바보야"라며 화를 내거나, 두발자전거를 배우면서 내가 알려준 넘어지지 않는 방법이 잘 되지 않자 "엄마 말 거짓말이야. 엄마 말 못 믿겠어. 내 마음대로 할 거야"라는 식이다. (이 때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 만 하루만에 두발자전거를 마스터했다)어린이집에서 다른 아이 팔을 깨문 적이 있고, 유치원 때도 친구를 때리고 누워서 발버둥치다 선생님을 발로 찬 적이 있고, 작년에도 친구에게 발차기를 한 적이 있고, 담임선생님 핸드폰줄을 가위로 자른 일로 집에 전화가 왔다. 이런 류의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사과를 했다. 충동적으로 깨무는 습관과 화가 날 때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는 습관은 다행히 엄격한 훈육을 통해 거의 고쳐졌다.
그저께는 읽어야 할 책에 글자가 많다는 이유로 "이 책은 그림책이 아니야. 엄마가 오늘은 그림책을 읽어도 된다고 해놓고 왜 그림책이 아닌 책을 읽으라는 거야"를 반복하며(누가 봐도 그림책이었다) 나를 따라다니며 오기를 부리는 아들을 대판 혼냈다. 혼나는 과정에서 보이는 아들의 태도에 점점 더 화가 나서 책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내내 기분이 울적했고, 밤에는눈물을 펑펑 쏟았다.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심하게 화를 낸 스스로가 한심하고 비참했다. 육아가 아니면 이런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육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없이 덮어놓고 아이를 갖고 낳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해도 아이를 낳은 것을 되돌릴 순 없다. 어떻게든 아이들과 잘 지내봐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건전한 삶을 영위하는 시민사회 일원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포기할 수는 없다. 근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화가 치밀고, 눌러놓은 화가 가끔씩 폭발한다.내가 지정한 책이 그림책이 아니라며 오기를 부리는 아들에게 크게 화가 났던 이유는, 그날 오전에 축구수업에서 감독님이 패스연습을 시키며 "공을 높이 멀리 보내지 말고 살살 던져 발 바로 앞에 떨어지도록 해라"라는 말에 정확히 그 반대로 공을 높이 멀리 계속 던지는 아들을 보며 '일부러 시키는 것과 반대로 하는 저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대폭발했던 날의 다음날에는 일부러 아이와 거리를 좀 두었다. 영어숙제를 하러 자기 방에 함께 가달라고 해서 방에는 함께 가주었지만,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옆에서 알려달라는 요청은 거절했다. 아들은 내 거절을 한 번에 받아들인 적이 없으므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모르는 영어단어 스펠링을 엄마가 알려줘야 한다고 항의했다. 예전 같았으면 숙제를 대신해줄 수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합리적인 논거를 들어 설명했을 것이고, 그러다 말꼬리 잡는 아들과 다투면서 또 화를 냈을 것이지만, 이 날은 그냥 "숙제는 남이 대신해주면 안돼"라고만 했다. 자신이 뭐라고 계속 말해도 내가 그냥 안된다고만 하니, 아들도 제풀에 지쳐 숙제를 시작했는데 숙제하는 태도가 아주 가관이었다. 자기가 생각한 스펠링이 틀리고 잔여 시간이 째깍째깍 줄어들자(10개 단어의 타이핑을 연습한 후 마지막에는 제한 시간 내에 타이핑을 해야 한다) 책상 앞에서 방방 뛰면서 "이건 선 넘은 거다. 이건 진짜 너무너무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라며 화를 냈다.예전 같으면 '숙제가 안 될 때 화를 내는 것보다 침착하게 할 때 더 빨리 끝낼 수 있다. 침착해라"라고 알려주다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아이에게 또 화를 냈겠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지켜보았다. 아이는 화를 내다 제풀에 지쳤고, 결국에는 마지막 단어까지 타이핑을 완료했다. 끝까지 숙제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숙제를 다해야 게임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이런 류의 규칙(숙제를 다해야 게임을 한다. 새로운 게임은 하루 1개 이상 설치할 수는 없다)은 잘 지킨다. 다행이다.
한 시간의 게임시간 후 거실 물건을 함께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들이 입었던 태권도복이 보이지 않아 어디에 두었냐고 물으니, 베란다에 있는 스포츠복 빨래통에 가져다 넣었다고 한다. 맨날 뒤집어 벗은 그 상태 그대로 거실 바닥에 늘어놓더니 웬일인가 싶다. 정리시간에도 군소리 없이 자기 물건을 자기 방으로 잘 옮겨놓는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는 아들도 눈치를 보는 건가 싶어 마음이 또 좋지 않았다.
내가 애정하는 책 '홀가분한 삶'에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어린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없다. 육아는 홀가분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이 책을 읽으며 눈치챘어야 하는데..
아직도 방법은 잘 모르겠고, 애써 생각해낸 방법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크게 흔들린다. 세간의 기준에 흔들리기 싫어서 육아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 것이 오만이었나 싶을 때도 있다. 개인주의자인 내게는 육아가 많이 버겁다. 남들은 아이들이 천천히 크면 좋겠다고 하던데, 나는 아이들이 크는 게 반갑고 청소년이 되면 오히려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버거움을 인정하고, 너무 욕심내지 말고, 지나치게 애쓰다가 제풀에 지쳐 실망하거나 화내지 말고, 아이들을 타인으로 여기고(얼마간 거리를 두고) 존중하며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목표다.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