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생 시절에, 기록형 사례 과제가 종종 나왔다.
약 2주 정도의 기한을 주고, 가상의 사건 기록에 대한 답을 서술식으로 적어 내는 것이다. 기한과 분량은 대학교의 레포트와 비슷한데, 정답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연수생들의 스타일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첫째는, 모범적이고 우수한 성적 상위권 연수생들로, '빠르게 직접' 과제를 수행하는 유형이다.
둘째는, 빠릿빠릿하고 현실적인 속세형으로, 신속하게 기출답안을 적당히 베껴서 과제를 마무리한 이후 편한 마음으로 다른 일에 시간을 보내는 유형이다.
셋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형으로, 이번 숙제만큼은 직접 해야지!! 라는 의욕으로 기출 답안을 베끼지 않고 과제 마감일이 임박할 때까지 괴로워하다가(해야 하는데..하기 힘들 것 같아..이제 진짜 해야 하는데..의 반복) 마지막 하루이틀에 몰아서 과제를 하는데, 기출 답안을 완전히 베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직접 하는 것도 아니면서, 애매하게 고생하고 어중간한 결과물을 내놓는 유형이다. 내가 바로 '미루면서 고생하고 결과물도 어중간한 유형'의 대표주자였다. 나 같은 사람은 과제 마감일까지 주어진 2주일 중에서 실제로 과제를 하는 것은 고작 이틀 정도면서,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마음을 쓰느라 마치 14일 내내 과제를 한 것 같은 피로감에 시달리곤 했다. 과제를 하지 않는 시간에 평온한 마음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첫번째 유형 우수한 모범생 타입의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두번째 유형은 연수원에 가서 비로소 발견한 신유형이었다. 너무도 신기하고 부러운 유형이라, 당시 남친이던 남편에게 "서울대생들은 숙제를 베낄지언정 빨리 끝내버리더라! 우리랑은 달라!!"라고 놀라움을 여러번 전달하곤 했다.
고백건대, 나도 베낄지언정 숙제를 빨리 끝내는 유형이 되고 싶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착수하지 않고 끙끙대는 시간만 길어지고, 정작 본격적으로 착수한 이후에는 시간에 급급해 헐레벌떡 어중간한 결과물로 마무리하는 '잘하고 싶은 마음 + (그러면서도 또는 그래서) 미루는 마음'의 콜라보는 정말이지 그만하고 싶었다.
베낄지언정 할 일을 빨리 끝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첫째 임신 때 태교로 '할 일 미루지 않기'를 마음먹을 정도로 강한 소망이었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 + 미루는 습관은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미루는 동안 그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을텐데, 조급한 마음을 타고난 덕분에,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그걸 어서 해버려야 한다는 안달감에 (정작 그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음부터 벌써 피곤해지곤 한다.
태교가 무색하게도 첫째 역시 나와 같은 유형으로 타고난 것 같다. 하루에 학습지를 한장씩 풀어야만 동영상 시청이 가능하다는 우리집 규칙이 있는데, 어느날 아들이 학습지를 너무나 풀기 싫어하길래 다음날로 미룰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랬더니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오후 내내 "꼭 어제 미룬 것까지 2장씩 풀어야 하냐, 그냥 1장씩만 풀면 안되냐. 1장씩만 풀어도 그냥 동영상을 보게 해달라. 오늘 2장씩을 푸느라 시간이 늦어지면 늦게 시작한 만큼 조금 더 동영상을 보게 해주는 것이냐'며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본인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조를 시간에 그냥 학습지를 딱 1장이라도 풀든지, 아니면 학습지를 이따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지금은 그냥 재미있게 놀든지, 왜 학습지를 풀고 있지도 않으면서 계속 학습지를 생각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엄마를 피곤하게 하냐"고 잔소리를 하다가 뜨끔했다. 그래, 내 아들이 누구를 닮았겠는가, 정확히 나를 닮았다. 내가 아들에게 한 잔소리는 나 자신에게 몇번이나 했던 채찍질이고, 스스로에게 몇번을 얘기하고 다짐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성이다.
얼마 전 브런치 구독자가 100명을 돌파했다(감격적이다). 그보다 더 뿌듯한 것은 작년 7월에 첫 글을 발행한 이후 글을 34개나 꾸준히 썼다는 것이다. 남편이 농담처럼 이제 글로 먹고 살게 되는 거냐고 묻기도 하고, 나 역시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글로 먹고 살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었다. 그런데 나 같은 유형(잘하고 싶은 마음과 미루는 습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은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는 못할 것 같다. 얼마 전에 독서모임에서 읽은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에 '간만에 시간이 나서 원고빚을 갚았다'는 표현이 있었다. 원고 작성을 '빚'이라고 표현하다니. 요즘 집요정 도비가 된 심정으로 미리 받은 수임료에 대한 빚을 갚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글쓰기도 빚 갚는 마음으로 쓰게 된다니, 정신이 번쩍 드는 표현이었다. 이 표현을 보고 내가 작가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한 번 상상을 해보았는데, 마감을 며칠 앞두고 산책을 하며 깊은 한숨만 내쉬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부족한 필력보다, 미루는 습성 때문에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엊그제 북까페에서 제목에 끌려 집어 들었던 '웹소설 써서 먹고 삽니다' 라는 책에서도 매일 일정시간 책상에 앉아 원고를 써야 하는 고충이 묻어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에세이에서도 매일 새벽에 일단 책상 앞에 앉아 정해진 시간만큼 원고를 쓰는 일과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글로 먹고 사는 작가가 될 수는 없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글쓰기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다.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내면서도, 그러느라 에너지를 다 써서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해본 적은 없었던' 내가 작가가 될 작정도 아니면서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글을 써온 것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잘하려고 애면글면 애태우지 않고 일단 그냥 쓰고 보자는 마음으로 써 온 글쓰기는 지난 1년간 나의 삶을 꽤 많이 변화시켰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되었고, 지금 드는 생각과 지난 날의 생각을 연결시켜 보기도 하고, 그런 생각들을 글로 적는 과정에서 한 번 더 정리가 되기도 했다. 꾸준히 글을 써 온 덕분에 지난 1년간 우리집에는 내 방이 생겼고, 회사의 업무량과 급여를 줄였고, 소득이 줄어들었지만 더 여유 있게 보낼 방법을 모색하며 덜 소비하면서도 더 충만한 일상을 보내려고 노력 중이고, 집과 동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동네에서 독서모임도 꾸리고 있다.
지난 1년간 해온 글쓰기 외에도, 잘하고 싶어 애쓰다가 제풀에 꺾이지 말고 그냥 일단 한 번 해보는 일을 조금 더 늘려가고 싶다. 이를 테면 피아니스트가 될 작정은 아니지만 피아노를 꾸준히 친다든가, 외국에 가서 살거나 영어로 비즈니스를 할 것은 아니지만 영어회화 공부를 매일 조금씩 하는 그런 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