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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n 26. 2023

서두르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아빠의 외모를 빼닮았다. 내가 아빠를 얼마나 닮았는지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엄마가 돌 전후의 나를 안고 남원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다른 마을에서 버스에 탄 모르는 아저씨가 아기였던 나를 계속해서 흘끗거리더란다. 당시 어린 새댁이었던 엄마는 알지 못하는 아저씨가 자꾸 를 쳐다보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아기인 나를 꼭 안고 있었는데, 급기야 그 아저씨는 말까지 걸어왔다. "혹시 운봉에 사는 ***의 딸 아닌가요. 긴가민가 싶은데 하도 닮아가지고 딸인가 싶어서.." 돌쟁이였던 내가 얼마나 아빠를 닮았으면 버스에서 마주치고도 아빠의 딸인지 알아맞혔을까 싶다. 


그런 내게는 고모 한분이 있다. 아빠랑 고모는 닮은 외모다. 따라서 나랑 고모도 아주 닮았다. 고모랑 내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마산으로 시집간 고모네 집에 놀러를 갔는데, 당시 고모의 시아주버니가 나를 보고 "조카가 아니라, 결혼하기 전에 낳아두고 온 딸이 아니냐"라고 놀렸다는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수십 번쯤 들은 것 같다. 내가 봐도 고모는 진짜 나랑 닮았다. 그래서 고모를 보면 '내가 미래에 저런 외모가 되겠구나' 싶다.


그런 고모가 희귀 질환으로 많이 아프시다. 아주 건강하고 산을 좋아하던 활동적인 고모였는데, 처음에는 걷기가 힘들어졌다가, 점점 일어나기가 힘들어지고, 움직이는 것도 어려워지고,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지금은 병원침대에 누워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고 눈과 표정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몇해 전부터 고모를 한 번 보러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국에는 직계가족조차 면회가 어려웠다. 그리고 고모가 자신의 상태를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나는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고모를 좀 닮아서 그런 고모의 마음을 이해한다) 섣불리 찾아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년이 흐르는 동안 고모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켠이 미안했다. 그러다 최근 사촌동생을 통해 '한 번 병원에 와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말에는 기차예매가 힘들어서 평일에 가기로 했다. 모처럼 일정이 없는 평일 오전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고모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곳곳에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렸지만 공기가 맑아 시야가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만난 고모는 몸은 야위고 잦은 경련에 힘겨워보였지만, 눈빛이 또렷하고 안색이 맑았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반가워서 눈을 동그랗게 힘주어 뜨는 고모를 보니 반갑고 속상해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울지 않고 즐겁게 얘기하고 오려했는데, 힘을 줘서 밝은 목소리로 나와 가족의 근황을 고모에게 들려주고, 고모를 간호하시는 고모부의 얘기를 듣다보니 시간이 훌쩍 흘다.


돌아갈 기차시간과 점심식사 때문에 병원을 나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빠듯해서 점심을 먹을 시간이 약간 부족했다. 원래 병원 근처 사촌동생이 추천한 곰탕집을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니 일단 기차역으로 가고 기차역 근처에서 대충 때울까 싶었다. 그런데 다 먹지 못하더라도 병원 근처에서 곰탕을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까지 왔는데 추천받은 근처 식당에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먹고 이동하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식당에 가서 곰탕을 시켰는데, 곰탕과 함께 솥밥이 나왔다.


곰탕과 솥밥


솥밥은 뜨거워서 서둘러 먹기가 어렵다.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다. 아들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기차표를 검색해보니 원래 타려던 기차의 다음 기차를 타도, 아들 하원 시간과 비슷하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르고 싶지 않아 기차 시간을 바꿨다. 진한 곰탕국물밥을 말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누룽지까지 천천히 다 먹으니 배가 불러서, 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한 정류장을 걸었다.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습기 가득한 길을 걷는데 짙은 흙냄새와 나무냄새가 훅 끼쳐왔다. 바로 옆에 시립도서관이 있어 우거진 나무에서 나는 향기였다.


시립도서관 옆길


서두르고 싶지 않아진 덕분에, 곰탕을 천천히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걷기 좋은 길까지 걸었다. 버스 타고 전주역으로 향하니 꼭 여행온 기분이었다.


활동적이었던 고모와 마찬가지로, 나도 산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한다. 기차, 버스, 곰탕, 산책, 나무, 도서관.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고모를 만나러 갔다 오는 길에 마주친 좋아하는 것들을 아픈 고모가 고모를 꼭닮은 내게 전해주는 선물로 여기며, 속상한 마음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앞으로도 쓸데없이 불필요하게 서두르지 않겠다, 열과 성을 다해 느긋해지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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