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살기 위해 잠시 쉬는 중입니다.
얼마 전 동료 변호사와 아이들 학습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 수업 시간에 항상 선생님 말에 항상 귀 기울였고 딴짓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우리 애들은 수업에 집중을 안 하고 딴짓도 엄청 한다. 얘네는 공부 말고 다른 길을 가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더니, 내 말을 듣던 동료 변호사가 "자기는 어릴 때 선생님 말에 집중을 해본 적이 없다."라고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해서 공부로 대학을 가고 시험에도 빨리 붙은 거야?"
동료 변호사가 답했다.
"지는 게 싫었다. 특히 나를 무시하던 애들보다는 잘하고 싶었다. 나를 무시했던 애들 덕분에 걔네보다 나은 대학을 갔고, 나를 비웃었던 대학 친구 때문에 그 친구보다 먼저 시험에 합격했다."
유레카. 그렇구나.
내가 말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남을 이기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고, 공부에서도 다른 아이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이 없는데, 진짜 신기하다."
동료가 놀라면서 물었다.
"그러면 누나는 왜, 무엇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러게,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을까. 무엇이 나의 원동력이었을까. 그 자리에서 답이 딱 떠오르지 않아서, 동료의 질문을 여러 날 마음에 품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보았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별히 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이고 안정적인(실패가 적은) 선택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우리 아이들 나이였을 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우리 둘째 나이인 9살 때 살았던 집은 작은 공용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서너 집이 함께 사는 단층 주택이었다. 변기가 있는 화장실은 마당 한편에 있었고, 서너 가족이 그 화장실 하나를 함께 사용했다.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집 밖으로 나가 작은 마당을 지나 화장실을 가야 했으므로 밤에 어린아이 혼자 가기엔 무리였다. 네 명의 자식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엄마가 깨서 함께 가줄 수가 없으니, 밤에는 집 안에 요강을 두고 잤던 것 같다. 집에 샤워실은 따로 없었고,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세수를 했고 머리를 감았다. 추운 겨울에는 엄마가 물을 데워주었을까, 세수를 생략했을까. 샤워 대신 일주일에 한 번쯤 동네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했다. 엄마는 자식 4명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힘차게 자식들의 때를 밀어줬다. 그때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와 깨닫는다.
우리 첫째 나이인 11살 때 살았던 집은 그보다는 좀 나았다. 다가구주택 반지하였지만, 우리만 쓰는 화장실이 집안에 있었고, 화장실에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부엌 겸 거실이었지만 어쨌든 거실이라는 공간도 처음으로 생겼다. 반지하라 창문 밖으로 사람들 다리가 보였고, 비가 엄청 많이 왔을 때는 일대 반지하 집들에 다 물이 찼고, 우리 집도 살짝 물이 차서 열심히 물을 퍼내던 기억이 있다.
16살 때 처음으로 '우리 소유'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20평대 아파트여서 6명이 살기에는 좁았지만, 그전까지 살던 집에 비하면 대궐 같았다. 이사하는 날 내가 "엄마, 집이 너무 넓어서 짐 옮기느라 계속 걸어 다녔더니 다리가 아파"라고 말했던 것은 부모님이 지금까지 기억하는 웃픈 문장이다. 그 집에서 결혼 전까지 살았고, 부모님과 네 명의 자녀가 두 개의 방(거실 미닫이문을 닫으면 세 개의 방)에서 생활해야 했으니 나만의 방은 언감생심 꿈꿀 수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라는 구체적인 문장으로 내 마음을 정리해보지는 못했지만(그랬다면 법조인이 아니라 금융인이 되었을까),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공부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운 좋게도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 문제를 풀어 정답을 맞히는 것은 내 적성에 맞았다.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한 것도 사실이지만 투입 대비 좋은 효율로 남들이 선망하는 대학교에 가고 비교적 빠르게 사법시험에 붙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오래 지켜온 나의 소신이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이 문장에 기대어 열심히 일을 했던 것 같다. 검사로 근무할 때는 '내가 맡은 사건 관련자가 검사를 잘못 만나서 잘못된 결론에 이르면 안 된다'는 긴장감으로, 로펌 변호사로 근무할 때는 '급여를 많이 받는 만큼 돈 값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개업 변호사로 일하면서는 '내 말을 듣고 사건을 맡긴 의뢰인의 신뢰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부채감으로 에너지를 끌어올려 열심히 일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유지되어서, 급여 중 상당 부분을 저축하거나 집 대출을 갚았다. 임신 중일 때도 매일 늦게까지 일했던 대형 로펌은 급여가 꽤 많았는데, 월급 960만 원 중 월 650만 원 이상씩 집 대출을 갚았다는 메모를 얼마 전에 발견했다. 상여를 받으면 명품백을 사는 대신 일부를 떼어 여행을 가고 나머지는 또 대출을 갚았다. 그 덕분에 경기도 30평대 아파트를 대출 없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방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더 이상은 가난하지 않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적은 없어서 그런지, 지금 사는 우리 집에 만족하고, '더 벌어서 서울 가야지, 더 넓은 집에 가야지'와 같은 상승욕구가 별로 없다.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여전해서, 얼마 전에 오래 끌어 온 민사소송에서 승소를 했는데도, 상대방을 이겨서 기쁘다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안도감만 들었을 뿐이다. 패소에 따라오는 당혹감과 죄책감, 낭패감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사건이 승소로 끝나면 더 이상 이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빚을 갚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기존 사건 업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폐 끼치기 싫다'는 소극적인 마음으로는 신건을 수임할 수가 없다.
이런 내게 어떤 것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일의 감각]의 조수용 작가는 네이버 임원 직에서 퇴사 후 "진짜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하다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만약 내가 100억 원쯤 가지고 있다면 뭘 하고 싶을까?'
생계가 해결되는 돈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해온 변호사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이 답을 얻기까지 정말 여러 권의 책을 읽었고, 내 마음을 살펴보는 시간을 꽤 오래 가졌다.
사실 20대부터 '의미 있다고 생각한 가치'가 있기는 했다. 그 말을 소리 내 말해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때는 이 가치라는 것이 공허하고 허황된 것 같아 말하면서 쑥스러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기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1) 도시와 농어촌의 균형 발전
- 이제는 균형이 아니라 소멸을 논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2) 교육 기회 균등
- 빈부 격차로 교육 기회가 양극화되는 것이 우려스럽다
그리고 엄마가 되면서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 가치도 있다.
(3) 일 가정 양립
그리고 소소하게는, 타인의 성장을 도우면서 나도 함께 성장하는 일을 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가능할지,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지는 아직도 탐색 중이다. 이제껏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으니, 조급해하지 않고 내년까지 천천히 알아가는 것이 목표다.
아직 내 나이 40대 초반,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새로운 일을 탐색하기에 전혀 늦지 않은 나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