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남매와 함께 하는 여름방학 첫날.
집안에서 더위와 아이들과 부대끼면 자꾸 화가 난다.
어디라도 가야 한다.
초등학교 도서관이 방학 기간에도 열고, 학부모도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몰라서 그냥 흘려보낸 지난 3년의 여름방학이여!!)
아이들은 학기 중에는 깨워도 안 일어나더니, 방학이 되니까 안 깨워도 알아서 일어난다. 어이없는 녀석들, 그러나 나도 어릴 때 그랬던 것 같다.
그 덕분에 계획했던 시간, 아침 아홉 시 반에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데도 아침부터 햇빛이 강렬하다.
각자의 양산을 쓰고 15분쯤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도서관에는 이미 제법 많은 아이들이 와 있다.
푹푹 찌는 바깥과 달리 실내는 시원하다.
학교 도서관은 넓고 시원하고 쾌적하다.
도서관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짐을 꺼낸다.
우선 텀블러에 담아 온 시원한 커피를 꺼내 목을 축이고,
매일 아침에 쓰는 다이어리 2종을 꺼내 전날의 일기를 쓴다.
내일까지 반납해야 하는 책 두 권을 꺼내 번갈아 읽었다.
이걸 배낭에 다 담아 오느라 어깨가 너무 아팠다.
내일까지 반납해야 해서 빨리 읽어야 하는데,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한 편을 읽고 나면 여운이 남아 다음 편을 연속해서 읽을 수가 없다. 곤란하다.
내가 이런 호사스러운 활동을 하는 사이에, 남매들은 각자 흩어져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를 찾아서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첫째의 방과 후 수업(우쿨렐레) 시간이 되어서 알려주고, 둘째가 춥다고 해서 스카프를 꺼내주고, 목마르다고 해서 물통을 꺼내주는 정도만 거들어주며, 오전 시간에 나의 책을 읽으며 보낼 수 있다니! 이렇게 시원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감격스러웠다. 성가신 의뢰인의 반복되는 문자가 평화를 자꾸 깨뜨렸지만, 오후에 연락하자고 시간을 정해 미루니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실 자꾸 신경은 쓰였다. 그러나 시간을 정해 미뤘으니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점심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계획했던 대로 마라탕을 먹으러 갔다. 우리 남매는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마라탕을 참 먹고 싶어 한다. 1단계도 너무 맵다며 0단계나 0.5단계를 주문하고, 그조차 한 그릇을 다 먹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이 먹고 싶어 했던 것을 먹으면 서로 편하고 행복하다. 마라탕집과 같은 건물에 있는 빵집에서 눈꽃팥빙수로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고 뙤약볕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둘째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집에 도착하니 두 시. 이불빨래 널기 등 간단한 집안일을 하며 쉬다가 의뢰인과 약속한 세 시가 되어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은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업무를 하면 될 것 같다. 업무를 이렇게나 많이 줄였는데도, 해야 할 일이 매일 한 두 가지씩은 꼭 있다는 것이 희한하다. 일하는 것이 성가시지만, 임신 중인데도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일했던 과거에 비하면 오늘날 하루 두 시간의 업무는 대단한 호사다.
집에서 업무를 하면 꼭 아이들이 한두 번은 찾아와 귀찮게 군다. 받아주다 보면 하염없이 일이 늘어지므로 단호하게 일하는 중이라고 내보낸다. 다섯 시에 업무를 마치고, 마라탕집에 놓고 온 딸의 교정기를 찾아오면서 간단하게 장을 보았다. 집에 와서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밥이 되는 시간 동안 유튜브를 틀고 유산소+근력 운동을 한다. 적당히 숨차고 근육에 뻐근한 느낌이 들면 기분이 좋다. 운동을 하는 내 옆에서 아들은 티비로 소닉 만화를 보고, 딸은 조용히 낮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평온하고 호사스러운 방학 첫날이라니. 어디 멀리 다녀온 것도 아닌데 적당히 피곤하고 보람차다. 책도 읽고,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히고, 운동도 하고, 아이들을 밖에서 제법 많이 걷게 했다. 집중해서 업무를 하고, 아이들도 돌보았으며, 집안일도 했고, 저녁으로 집밥도 차려 먹고, 마지막으로 글까지 쓰며 마무리하는 멋진 하루다.
남은 방학이여, 오늘만 같아라! (그럴 리가)
소박하지만 호사스러운 방학 첫날을 보내며 깨달은 것.
내가 '아 오늘 충만한 하루였다'라며 개운하게 잠들기 위해 필요한 최소 활동이 몇 가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 아침에 전날 일기 쓰기, 하루 계획하기
(2) 아침 6시 40분에 라디오로 20분 영어공부
(3) 책 읽기 - 방해 없이 30분 이상
(4) 운동하기 - 적당히 숨차게 20분 내외로도 충분
(5) 업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6) 최소 한 끼는 집밥 해 먹기 - 만들고 치울 수 있는 여유
여기에 글 쓰는 시간까지 가질 수 있다면, 보람은 최대치로 올라간다.
방학 동안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그러지 못했던 시간을 기억하자), 그러면서도 위에 적은 '필요한 활동'을 잘 챙기며 충만하고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