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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17. 2022

<반쪼가리 자작>

귀여운 천재 작가가 만든 재밌는 우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은 <우주만화>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고 이 책이 세 번째다. 어쩐지 역순으로 읽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또한 작가의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재밌는 방법이긴 하다. <반쪼가리 자작>은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소설은 ‘나’라는 화자가 전해주는 우화 형태의 이야기다. 내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에 돌아온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사춘기를 맞을 때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나는 “의무와 도깨비불만이 가득 찬 우리들의 세계”인 그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고 남게 된다.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반쪼가리가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된 외삼촌을 비롯해서 ‘나’가 친구로 지내던 트렐로니도 그렇고, 함께 살아가는 피레트로키오, 문둥이들, 파멜라와 유모, 위그노교도 등 모두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우화의 중심에는 분명히 반쪼가리 자작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화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문제적 인물은 의사 트렐로니다. 바깥 세계에서 배를 타고 떠돌다가 이곳으로 온 트렐로니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의사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엉뚱하게 도깨비불을 연구한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의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는 때는 반쪼가리 자작을 하나로 붙여줄 때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그가 왔던 세계로 배를 타고 떠나버린다. ‘나’는 트렐로니를 따라서 떠나고 싶지만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다가 그 순간을 놓쳐버린다. 


    트렐로니가 가 버린 세계는 ‘나’에게 진짜 세계처럼 인식될 수도 있고 ‘나’가 욕망하는 세계일 수 있다. 트렐로니가 연구한 도깨비불은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우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을 연구하다가 떠났지만 나는 떠나지 못했다. 나는 우화의 세계에서 박제되어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트렐로니는 우화의 세계에 들어와서 그것을 연구하다가 결국 훌쩍 떠나버렸다. 트렐로니라는 인물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이 쓴 우화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우화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세계이면서 어린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는 명징하면서 익숙한 상징이 있고 우리는 그곳에서 항상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 세계는 이미 사라져 버린 도깨비불처럼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추억 속에서 한 번씩 떠올리게 되는 세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비슷하게 우리는 환상 속에 잠깐 빠져들었다가 조금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곳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세계에서 살지는 못한다. 세계는 아무래도 훨씬 더 복잡다단한 곳이 아닌가. 자작 혼자서는 행복한 시대를 이룰 수 없을 만큼 세상이 아주 복잡해졌으니 말이다. 


   소설은 단순해 보이지만 분명히 생각할 점을 많이 던져주고 있다. 게다가 칼비노는 ‘나’를 화자로 내세우면서 우화로 제시한 세계에 대해 한 번 더 거리두기를 해서 문학적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면 그는 분명 “귀여운” 천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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