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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23. 2021

<현란한 세상>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발휘하는 상상력

   책을 읽으면서 소설의 제목처럼 현란하다는 기분이 드는데, 그런 느낌은 시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런 시점의 차이는 당연하게도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에 관한 기록은 그 사람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인데, 그것이 역사라고 규정되면 마치 정전처럼 취급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려는 장치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동일한 사건을 두고 화자를 바꿔가면서 기술하고 있다. 그걸 통해서 독자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의구심을 (어쩌면) 품게 될 지도 모르니까. 


   작가는 개인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자유로운 목소리를 내는 세르반도 수사라는 인물을 빌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한 줄기의 희망도 발견하기 힘든 현실을 살면서, 작가는 그것을 잘 포장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현실에 대한 환멸을 뛰어넘기 위한 유희로서의 문학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 또한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의미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희망이 아니라, 어떤 상징 혹은 이미지로 남는 문학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품 초반에 “세르반도 수사, 지칠 줄 모르는 피해자”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시간에서건 진실되고 비통한 인간을 발견할 때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현재성, 즉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그가 존재했느냐 안 했느냐와 상관없이 분노와 사랑으로 인해 영원하며, 그리스도는 역사가 기록하든 안 하든 그의 실현하기 힘든 철학으로 영원하다. 그 비유, 그 이미지는 영원에 속한다.” 


   우리는 이것을 작품의 마지막에서 수사의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죽어서도 평안을 얻지 못”한 세르반도 수사의 운명은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소비되어 영원히 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 뒤의 삶>이 떠올랐는데 두 책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듯,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가 너무 끔찍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작가는 억지로 희망을 말하기보다는 이렇듯 어두운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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