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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18. 2021

<세상의 끝>

지독한 무의미함에 대한 독백

   지옥과 같은 세상의 끝, 앙골라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평온해 보이는 리스본의 일상에 적응하기 힘들다.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전쟁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현실이야”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내면은 전쟁의 경험과 지금의 일상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발화도 명료하지 않고, 생각의 흐름 또한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와 저기, 천국과 지옥, 이성과 감정 사이를 정신없이 오고 가는 그의 내면은 길고 긴 문장으로 나타난다. 


   현실을 표현할 적절한 비유를 아무리 길게 늘어놓아보아도 결코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그 문장 하나하나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현실은 부정하고 싶었으나 너무 선명하게 각인되어 버린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변해버리고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것이 전복되어 버린 그 사실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서사적 흐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비유로 가득한 긴 문장들이다. 그의 문장들은 긴 호흡과 장황한 비유 때문에 선명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혹함에 내던져졌다가 돌아온 주인공에게 남은 것은 그 경험의 의미를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운명적 당위성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희생된 힘없는 자들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고 그 지독한 무의미함에 대한 이야기다. 무의미한 것에 서사적 정형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것보다는 어쩌면 이런 정신병자의 독백이 훨씬 더 잘 어울릴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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