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에도 불구하고 알게 되는 픽션의 재미
한 천재 작가가 문장을 가지고 벌이는 최상의 게임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 자칫 게임이 시시해질까봐 가장 자극적인 배경을 설정해둔 채로 말이다. 독자가 자극적인 스토리에 현혹되려고 할 때마다 작가는 위치를 바꿔가면서 독자에게 자꾸만 말을 건다. 우리는 지금 소설 속에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게임을 하다가 너무 빠져들어서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까봐 주의 문구가 등장하는 것처럼, 작가는 매우 친절하게도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진부함의 늪에 빠지지 않고, 독자가 그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도 당혹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벌이는 게임이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지극한 즐거움 속에서는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법이니 말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길 “픽션은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라고 했듯이, 예술의 불멸성은 극도의 미학에 있다고 보았다. 작가는 미적 쾌락과 사회적 금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 절묘한 줄타기를 매우 성공적으로 이뤄냄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현실 혹은 실제를 하나의 기준과 의미로 해석하기를 거부하고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한 가지 의미에 갇혀 살아가기에는 인간의 욕망은 너무나 크고 다양하여(미적 욕망마저 포괄해서) 그것을 변형하고 비틀어 마침내 확장해내야만 지고의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그것들을 문학을 통해서 이렇게 맛보게 해주는 작가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미적 즐거움이란 어느 것이나 소박한 성적 자극으로 완벽하게 대치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작가가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외설적인 포르노와는 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다. 왜냐하면 음탕한 색체가 점점 늘어나기 보다는 “소박한 성적 자극”을 줄기차게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작가가 서문과 작가의 말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소아성애라는 소재에 매몰되어 버리면 이 소설에서 다른 의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법이 인간의 성교와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을 개탄한다. 이렇듯 하나의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갖게 한 것은 지퍼를 꼭 잠그고 있는 속물들에 대한 신의 복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수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다.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이 진정 안타까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