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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y 01. 2021

<아산>

질린 소령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요.

   러시아 소설이라고 하면, 고전으로 알려진 유명한 작가들의 소설들은 대충 읽었던 것 같다. 한 번 러시아 작가에 꽂히면(?) 그 묘한 매력에 빠져서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서 읽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한동안 읽지 않게 되면 또 굳이 찾아서 읽지 않게 되는 소설들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았던 것이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였던 것 같은데-내 기억은 스스로도 전혀 믿지 안지만-, 소비에트 문학에 살짝 회의를 느끼며 러시아 소설들을 더 이상 읽지 않았던 것 같다. 

   블라디미르 마카닌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생소했다. 책의 제목과 두께를 보니, 선뜻 손이 갈 만한 소설이 아니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계속 문장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체첸전이 배경이라고 했는데, 전쟁 상황의 긴박함이나 잔혹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상투적인 소설이 아니라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문장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연민이 이 전쟁에서 남은 유일하게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냉소주의자일까. 앞부분을 읽다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질린 소령이 하는 행동을 보면 냉소주의자로 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질린 소령에게 아군이자 신은 "돈"이니까. 러시아군이든 체첸군이든 상관없고, 이념이든, 옳고 그름의 경계 같은 것들도 큰 의미가 없다. 돈이 되는 일이면 괜찮은 것이다. 그렇게 보였다. 처음에는. 


   그런데 이 매력적인 소설을 계속 읽다 보니, 질린 소령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쟁을 겪은 우리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보면, 그저 기회주의자에 회색분자 혹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는 놈으로 보일 뿐인데 이런 작가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념의 차이라는 그 공허한 외침과 주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정작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과의 그 커다란 간극을 누구보다 더 잘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속에서 의미 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질린 소령의 별명이 "아산"인 이유를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점은 질린 소령의 태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이념에도 복무하지 않는 것과 엘리트주의적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일수록 작가가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딘가 묘한 지점에서 작가의 엘리트주의를 엿볼 수가 있다. 전쟁은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한 것을 유의미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여러 장치들을 내포하고 있고 그 중 가장 위험한 요소가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한다. 소수의 권력자의 목숨이 다수의 민중의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자칫하면 그런 것에 속을 위험이 꽤 많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은 그런 위험 요소가 없는, 귀한 소설이다. 그래서 질린 소령의 마지막 선택이 안타까우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작가를 향해 박수를 치게 된다. 


   그래서 <아산>은 다시 러시아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주는 소설이 되었다. 누군가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충남 아산"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런지 아닌지는 독자가 직접 확인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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