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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Apr 20. 2021

<신뢰 연습>

신뢰를 연습할 수 있을까요

   처음 읽고 나서 느낀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지독히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을 참아가면서 꾸역꾸역 읽으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인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대를 배반하는 책들도 많다. 하지만 "전미도서상 수상 소설"이라는 타이틀은 아무 소설에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끝까지 실망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노력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수상작"이라는 것에 회의를 하기 시작했고, 또 그런 것 -공신력이랄까- 에 혹해버린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상을 받았다고 여전히 덜컥 믿어버리는 태도는 결국 누군가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의 판단을 비판 없이 신뢰해버리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저런 실망감을 안고 던져두었다. 


   모임원의 추천으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사실은 다시 읽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갖게 되어버린 편견 때문이었다. 다시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문장들은 읽히지 않았고, 그 이유가 전적으로 작가의 의도인지 번역 때문인지 판단하고 싶지도 않았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비교적 시간을 두고 꼼꼼히 읽었고,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소설의 내용을 복기하면서 생각을 했다. 이 책이 내게 왜 불편한 것인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이 낯설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느낌이었다. 서사의 줄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음에도 낯선 느낌이 드는 건 글쓰기 방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불편함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이 소설의 장벽을 넘지 못했던 것은 소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해서 정말 반가웠다. 


   두 번째로 찾은 이유는 시점이었다. 2부의 시점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하고 황당한 것이었다. 요즘 소설에 어디서, 작가가 독자에게 대놓고 말을 거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느냐 말이다. 그런 문장이 튀어나올 때마다 훕,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게 되었다. 그런데 1부, 2부, 3부의 실험적 형식과 함께 시점 또한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니, 이것 또한 노림수가 있는 낯설게 하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작가가 똑똑해 보였다. 


   소설의 주인공을 누구로 해야 할까. 세라? 캐런? 클레어? 캐런이 유력하지만 나는 셋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뉜 각 부의 화자들이면서, 여성 주체들이 각기 다르게 겪는 경험을 서로에게 살짝 걸쳐두면서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이 될 것 같아서 -읽으면서 알아차려야 하는 걸 작가가 의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다만 이 책의 1부는 연극 공부를 하는 학교 자체가 소재가 되어 있고, 2부는 그 자체로 연극적인 장치를 사용했고, 3부는 한 발짝 떨어져서 본 연극학교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소재 자체도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독서모임에서 누군가가 말해준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항상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런 주제를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신선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기존의 틀을 조금씩 깨고 약간의 파격들을 얹으면서 미적 세계를 창조해왔기 때문이다. 우린 이제 이런 소설을 만났고 앞으로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소설 속 매력적인 문장 몇 줄을 인용하며 <신뢰 연습>을 이제 신뢰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누구도 혼자가 아니니까. 우린 서로 상처를 주지."

   "왜 나 자신이 하는 선택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는 거야?"

   "선택할 때는 타인을 위해 선택하는 거거든. 우린 겹친다고. 엉켜 있지. 상처 주지 않을 도리가 없어." 

   "헛소리 작작 해! 나랑 얽힌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그런 거야. 나 스스로 총을 쏘면 그들에게 좋은 경고를 한 거지."

   "뭘 경고했는데?"

   "나는 그들이 아니었다는 단순한 사실."


   소설의 문장을 읽는데 연극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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