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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Feb 03. 2022

<태평양을 막는 제방>

식민지의 다양한 얼굴, 소설만큼 매력적인 작가

   여기 식민지로 들어온 똑똑하고 야망에 찬 여인이 있다. 식민지는 그녀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여인은 이곳에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 인생을 바꿀 커다란 기회인 것이다. 제국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신분상승의 꿈도 식민지에서는 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식민지로 들어갔고 요행만을 바라지 않고 인간적 노력을 거듭했다. 땅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고, 얻은 땅을 개간하기 위해 노력했고,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태평양조차도 막아보려는 노력을 또 했고, 그런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룰 수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기력해졌다. 제국주의의 또 다른 얼굴은 자본주의였으며 그녀는 제국주의의 힘을 업고 성공을 향해 달려갔으나 자본주의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혹은 식민지가 가진 거대한 자연의 힘에 굴복했을 수도.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두 명의 자식들이고, 자식들은 그녀의 희망과 절망 한가운데서 자라났다. 자식들은 그녀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그녀의 무모한 야망과 절망뿐 아니라 식민지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이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제프와 쉬잔은 그녀를 쉽게 떠날 수가 없다. 엄마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하고 그렇게 애증으로 얽힌 자식들은 엄마와 함께 시간을 견딘다. 그들은 무덥고 무기력한 불모지의 하루하루를 함께 견디고, 엄마를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상황을 견딘다. 그리고 기회만 오면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함께 벗어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동시에 타협하지도 않는다. 


    쉬잔이 조 씨에게, 혹은 실 판매상에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들에게 돈과 바꿀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쉬잔이 아고스티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몸짓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쉬잔은 소중하게 기억한다. 


   조제프가 어머니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의 희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자식들이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끝없이 길어 나올 것 같은 그녀의 희망도 끝이 있었다. 그녀에게 마지막이 된 것은 희망처럼 보였지만 절망의 의미로 돌아온 다이아몬드였다. 그것을 팔기 위해 도시도 갔다가 조제프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조제프가 떠난 뒤에는 다이아몬드가 다시 돌아왔어도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시작할 동력도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것은 죽음뿐이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제 비로소 그녀의 자식들은 그녀에게 희망이자 절망의 땅이었던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난쟁이 게들에게 무너진 제방처럼, 그녀의 희망이라는 것은 그 제방과 같은 것이었다. 태평양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쌓아 올릴 때는 선명해 보이지만 무너진 뒤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뒤라스는 한 가족의 절망과 사랑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셋 중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는다. 어느 한쪽으로 서게 되면, 우리가 식민지의 상황을 한쪽에서 보면 다른 쪽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눈을 한쪽으로만 보게 가려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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