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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r 05. 2022

<야만인을 기다리며>

우리는 제국 안 어느 곳에 있을까

   “자칼은 토끼의 내장을 찢어발기지만, 세상은 계속 굴러간다.” 소설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읽을 때의 쾌감과 동시에, 내장이 찢긴 토끼의 마음 혹은 토끼의 내장을 찢는 자칼의 마음으로 읽는 불편함으로 인해 생각이 복잡해진 소설이다. 


   제국의 변방에서 이민족의 문자, 역사 혹은 지도가 적혀 있는 목판을 수집하는 치안판사는 “옛이야기를 가지고 몸부림치고 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자신의 하는 수고의 의미를 알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제국의 경찰이나 군인은 그의 평화를 깨는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변방이긴 해도 제국 안에서 평화를 누리던 그는 제국의 일부이며 제국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야만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볼 줄 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제국의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그에게 야만인과 제국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만드는 계기는 졸 대령이 제국을 지키는 방식이었을까, 혹은 그의 양심이었을까. 


   죄의식의 근원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속죄할 필요를 느꼈고(제국의 일부였으므로), 야만인 여자의 발을 씻겨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여자의 노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데, 제국의 사람으로서 완벽한 속죄를 원하지만 자신도 결국 그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며, 어쩌면 자신은 지독한 고문자에게 당하고 온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해주는 역할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덜 나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제국에 함께 복무하는 사람이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고 해서 그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의 일부라서, 전혀 낯설지가 않다. 선한 본성과 의지,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시스템 안에서 살게 되었을 때 얼마든지 일어날 법한 일이다.(우리는 대체로 누구나 선한 본성과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시스템 자체를 없애기는 너무 무력하고, 시스템에 동의하기에는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분노와 슬픔,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본 적이 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공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무력한 주인공이(혹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주인공에게 삶의 의미는 기록이다. 역사가 충분히 왜곡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역사 혹은 죽음 뒤의 의미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의 의미까지 생각한다면 함부로 살기는 힘든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제국의 일부로 살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양심을 버리지 않은 주인공의 삶의 의미는 미래의 역사가 평가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야만인의 역사를 살펴보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소멸한 이후의 의미까지 생각한다는 것, 인간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주인공은 끝내 그것을 써내려가지 못한다. 역사는 결국 제국에 귀속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역사 바깥에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길을 잃은 주인공에게 남은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보여주는 눈사람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지고 말, 그러나 지금 현재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순백의 현존 그 자체였을까. 잘 짜여진 소설이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가진 답과는 별개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답을 구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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