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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Feb 05. 2022

<장엄호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독백

    보통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자잘한 어려움과 고통들은 우리 안에서 끝없이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작은 갈등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들은 우리가 무의식 속에 눌러두거나 꿀꺽 삼킨 채 살아간다. 그 상태가 너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때 때로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마 그 상태에서 더 미칠 것 같은 상태로 넘어가게 되면 바깥으로 소리를 내어 듣는 대상이 없는 상태로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가 말하는 것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걱정과 일상에 대해 알게 된다. 


   언뜻 보면 '나'의 일상은 버겁고 부당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의 감정들은 매우 오락가락한다. '나'에게 기숙하고 있는 아다와 아델이라는 언니들에 대해서도, 호텔을 물려준 할머니에 대해서도 '나'의 생각은 계속 왔다 갔다 하고 그 생각의 변화가 소설에서는 여실히 드러나있다. 언니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함께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데, 변화하는 나의 감정은 소설에서 투명하게 드러난다. 장엄호텔을 물려준 할머니 또한 대단한 존재로 인식되다가도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끝없이 오락가락하는 마음의 상태가 단순한 문장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표현되고 있는데 어째서 문학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일까.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과 공간, 대상 모두에게 우리는 균질한 사랑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사실 사랑의 속성도 아니며, 판타지로만 가능한 일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고 감정이 변화하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나’는 그런 사랑의 모습 혹은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독백은 우리 모두 마음속에서 부르짖고 있는 독백이다.(혹은 나만)


    이 소설은 그 아슬아슬한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늪 위에 세워진 호텔 그 자체가 삶을 상징하고, 삶이야말로 장엄호텔과 같은 것이 아닐까. 바깥에서 볼 때는 네온사인 불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늪 위에서 기우뚱거리면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것, 그렇게 불완전하지만 견디어내는 장엄호텔과 같은 것이 삶이 아닐까 싶다.   


    역자에 의하면 장엄호텔은 스러져가는 안식처라고 한다. 안식처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불안하고 변화하는 상태를 끌어안고 함께 시간을 견디는 상태, 장엄호텔처럼 스러질 것 같지만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은 것, 그것이 정말 안식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철도를 놓기 위해 이곳을 오는 남자들은 장엄호텔에 있는 여자들에게 구원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들은 그녀들의 삶에 구원자가 될 수 없음 또한 명백하게 보여준다. 아다의 병간호를 받고도 편지조차 하지 않는 현장소장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철도가 장엄호텔에 호재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은, 때로는 삶에서 로또와 같은 것이 희망처럼 보이는 것처럼, 살면서 어쩌다 한 번 품을 수 있는 허황된 꿈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철도 사업은 왔다가 가고 다시 왔다가 가면서 약간의 희망만을 던져줄 뿐 결코 삶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늪에 대항할 수 없다. ... 늪에 버티는 건 오로지 장엄뿐. ... 호텔이 기우뚱해도 쓰러지진 않는다.”라고 하는 것처럼 늪은 주어진 운명을 상징한다. 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삶이다. ‘나’에게는 장엄호텔이 삶 자체이며 그녀 자체인 것이다. “멀리서 보면 장엄은 선수가 반쯤 썩어 눈 위에 좌초된 배처럼 보일 거다. 좌초되었으니 완전히 가라앉을 염려는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오히려 ‘나’의 희망이 보인다. 좌초된 삶에서 절망을 보는 게 아니라 완전히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니까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짧은 독백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소설 안에 수많은 이유가 숨어있었다. 그녀의 독백들은 어느 순간 나의 독백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그 독백들을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위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종종 마음속에 품었던 삶에 대한 환멸을 그녀가 대신 내뱉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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