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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03. 2022

<용의자의 야간열차>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의미를 향해 달리는 기차

   제목이 중의적이라는 이 소설은 “용의자의 야간열차”이든 “야간열차의 야간열차”이든 제목이 내용을 배반하는 소설임은 확실하다. 그 불일치에서부터 소설의 재미는 시작한다. 작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의 불일치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화자의 위치도 그렇지 않은가. 화자가 마치 독자를 호명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당신’은 화자에게 매 순간 관찰되고 있다. 화자는 주인공과 일치하면서 일치하지 않아서 균열과 거리가 발생하지만 어쩐지 독자는 소설 안으로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간 느낌이다. ‘당신’이라고 부르는 화자로 인해서 자꾸만 열차 안에 있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관찰하는 주체와 현존하고 경험하는 주체는 분리되어 있지만 둘의 거리가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야간열차라는 공간 덕분이다. 자면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기차 안에 있는 주체는 완전히 깨어있는 것도, 완전히 잠들어 있는 것도 불편하다. 그렇다면 이 상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환상을 볼 수 있는 곳,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는 자신을 철저히 타자화시켜볼 수 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한 공간 안에서 함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잠에 빠져드는 순간 가장 먼 곳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열차 안에서 이제 막 만난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를 규정해주는 많은 의미 중 하나는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여간열차 안의 수많은 타인들은 나의 동일성을 수없이 해체한다. 어떤 타인이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나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착지는 규정될 수 없다, 필연적으로. 


    열세 가지 정류장(파리, 그라츠, 자그레브, 베오그라드, 베이징,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빈, 바젤,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뭄바이, 어디에도 없는 마을)은 마치 열세 량의 기차처럼 보이고 그 모든 기차 안의 ‘당신’ 혹은 ‘나’는 조금씩 다르다. 그곳에서 맺는 관계들도 모두 다른 모습을 띄고 있으며 열차의 모습대로 수평적이다. 모든 만남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며 “리스본행 야간열차”처럼 극적인 의미를 띄고 있지도 않다. 동시에 같은 곳에 존재하면서 영원히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는 존재들, 그리고 존재 자체의 균열과 불일치. 이 모든 것이 지극히 현대적이라서 현실적이다. 언젠가 기차는 사라지더라도 소설은 남을 것이다. 


 

줄 친 문장들 중 아주 일부


31쪽. 출발점과 도착점은 그대로인데, 그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꾸깃꾸깃 구겨졌다. 

32쪽.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지, 목적지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고,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35쪽. 아무리 기다려도 목적지에 닿지 않는 열차는 안 좋은 열차일까.

45쪽.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어쩌면 하고픈 말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 언어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말이 되기 이전의 ‘뭘 찾고 있는가’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야간열차의 선로 소리 같은 걸까.

72쪽. 시간은 제아무리 말을 쏟아부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시간에 말을 쏟아붓는 것은 사막에게 보드카를 마시게 하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76쪽. 인간은 화장실에 갈 때는 늘 혼자다. 피할 길 없는 운명인 것이다.

133쪽. 그날 나는 당신에게 영원한 승차권을 내주고, 그 대신 자신을 자신으로 여기는 뻔뻔한 넉살을 사들여 ‘나’가 되었다. 당신은 더 이상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게 되어, 언제나 당신이다. 그날 이래로 당신은 줄곧 묘사되는 대상이 되어, 2인칭으로 열차를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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