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릿책방지기 Mar 04. 2023

<개의 날>

나만 외롭다고 느낄 때 이 책을 읽어요

   동일한 사건을 동시에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에 대해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모두 다를 것이다. 사건의 파장이 마음속에 남는 분량도 모두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숙명적으로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각자의 과거와 기억도 다를 뿐 아니라 감각과 생각 또한 고유의 것이라서 그런 모든 것을 고려하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모두 지독하게 외로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여기 고속도로에서 달려가는 개 한 마리가 있다. 그 순간 고속도로를 달리던 여섯 명이 개를 보고 멈춰 선다. 개는 차를 피해 달리기도 하고 치여 죽기도 하고 어딘가로 도망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개 한 마리를 목격한 여섯 명에게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그 시간과 공간에 함께 있던 여섯 명도 그 순간을 공유하지만 각자의 느낌이나 기억은 모두 다르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필연적인 외로움을 본다.


   사건은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 개를 본다는 것뿐이지만, 그 사건이 독자에게 확인해 주는 것은 각자의 고독이다.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 있었음에도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인물들, 그들이 만약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존재론적 외로움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설정했을 것이다.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외로움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가 버린 트럭운전수, 신과 결별하려는 사제, 연인과 작별하는 여인, 자신을 버리려는 동성애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믿는 과부, 과부의 딸의 이야기가 모두 각자의 외로운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로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우리가 사무치게 외로우면 혼잣말을 하듯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은 동일하다. 각자의 일인칭으로 내면을 고백한다.


   개를 봤기 때문에 개를 통한 고백이 이어진다. 개와 나를 동일시하거나 타인을 대입하거나 개를 통해 나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한다. 그들이 목격한 것이 개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겠지만-사슴이거나 곰이라면 어땠을까-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밀한 존재인 개라서 더 많은 생각을 매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고독한 삶을 상상으로 채우는 트럭운전수는 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개가 고속도로에 버려지기 전에 어떤 개였을지를 상상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인생을 꾸며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 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 상상 속의 삶이 아닌 실제의 어떤 삶을 살아왔다."(29쪽) 개조차도 실제의 삶을 살았을 경우에는 상상으로 꾸며내는 삶을 만드는 게 불가능한 개별적 존재라서, 트럭운전수는 개에게 자기 동일시를 하지만 동시에 개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사제를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존재나 의미로도 상쇄시킬 수 없는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래서 읽다 보면 우울해진다. 우리에게 완전한 결합이라는 희망은 없는 것일까 하고.


  우리는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서 작은 한숨을 쉬며, 결국 모두 다 외로운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만 이렇게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저 작고 미묘한 위안을 얻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댈러웨이 부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