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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r 15. 2023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위대한 몽상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금 내 옆에 발자크와 같은 친구가 있다면 어땠을까. 


   창작 속도로는 거의 AI급이며 그런 속도로 내놓는 작품마다 넷플릭스 1위권에 있는 작가라고 한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시고 가고 싶은 사람인데, 현실에서 만나면 이건 뭐, 외모는 그렇다 쳐도 명품으로 휘감고 권력에 기웃거리는 속물 중의 속물 아닌가. 실제로 만나면 고귀한 영혼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어릿광대와 비슷한 사람인데, 그가 만든 창작물을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사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갖고 있으니, 이게 정말 동일인물인가, 진정 사기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볼 때마다 들 것 같다. 


   이렇게 부조리한 인물을 또 찾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팎이 다르고 위아래가 연결되지 않은 사람인데, 이런 작가를 앞에 두고 있으면서 츠바이크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짐작이 된다. 어쩌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작품만으로 작가를 말하고 싶을 정도로, 평전을 쓰면서 괴로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쓴 츠바이크는 발자크와는 전혀 다른, 대척점에 있을 만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발자크에게 매혹되어서 이 정도 분량의 평전을 썼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발자크가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임을 방증하는 것 같다. 어쩌면 츠바이크는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인간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 것이 아닐까. 츠바이크의 그 노력으로 인해서 우리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인간 발자크에 대해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 내 옆에 이런 인간이 있다면 나는 그런 인간을 친구로 삼을 자신은 없다. 역시 천재는 아무나 알아보는 게 아니다. 


   발자크의 작품은 <나귀가죽>,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사촌 퐁스>만 읽어보았는데, 사실 <나귀가죽>을 읽을 때만 해도 작가의 명성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장광설과 뜬금없는 감정과잉의 문체에 도무지 몰입하기가 힘들어서 꾸역꾸역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츠바이크도 말하고 있는 대로, 뒤로 갈수록 낭만주의적 요소가 빠져나가고 발자크의 지독한 경험들이 더 쌓여서 그런지 나머지 세 작품은 재밌게 읽었다. 인물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변해갔고 소설에 등장하는 현실은 어느 곳에 대입해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개연성을 띄었다. 발자크의 몽상이 현실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질 때마다 소설 안에서는 영글어간 셈이다. 빚을 갚는 도구로서의 글쓰기이기도 했지만, 그의 소설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는 상상의 도피처이기도 했던 것이다. 발자크에게 소설이라는 세계가 없었다면 그는 보다 쉽게 무너졌을 테고, 다시 일어날 용기를 갖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자크의 선택, 끝없이 쫓기며 사는 그의 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츠바이크는 인간 발자크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발자크가 선택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간 삶을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꿈을 오직 책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을 뿐,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발자크의 운명의 법칙.(657)”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이 한 사람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파국의 상황에서 혼란을 느끼고 절망 상황에서 창조하기는 불가능한데, 발자크라는 특이한 현상에서는 모든 논리적 결론이 빗나간다. 그가 살고 있는 두 세계, 현실과 상상 세계는 그의 내부에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서로 차단되어 있었다.(281)”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인간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안에 들끓고 있는 발자크와 비슷한 인간이 수만 가지 얼굴로 자리하고 있고 그것들을 하나로 묶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내면의 모습, 혹은 그것들이 흘러나오는 외적 모습들의 총체를 보여주는 발자크라는 인간은, 작품으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지만 츠바이크의 평전이 단연 최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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