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릿책방지기 Apr 01. 2023

<부서진 사월>

사월의 의미를 하나 더하고 싶다면

    알바니아 산악지대에 사는 부족들은 그들만의 관습법을 따른다. 관습법은 헌법보다 더 촘촘하고 일상적이라서 주변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어서 한순간도 의식하지 않고 살 수가 없다. 바깥에서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일들로 인해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보여주는 그조르그의 내면 풍경 때문에 더욱 스산하고 잔혹해 보인다. 스물여섯 해를 살아온 목적이 복수를 위한 것이라면, 그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다면, 그조르그는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채 알기도 전에 마치 자신이 사는 산악지방의 풍경처럼 황폐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산악지대 사람들의 삶에 일종의 경외감을 갖고 그들을 관찰하러 들어가는 작가, 베시안 보릅시가 있다. 그는 산악지대를 살펴보고 피의 대금을 관리하는 오로시성까지 가는 여정으로 신혼여행을 계획하는 대담함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의 의도를 잘 살피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디안이라는 인물은 산악지대의 풍경 아래서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 신혼부부의 여정은 “현실에서 벗어나 전설의 세계, 다시 말하면 서사시의 세계로, 우리 시대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서사시의 세계로 가는 거야.(75)라는 주변의 평가를 받지만 막상 둘이 그곳에서 목격한 것들은 서사시의 세계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베시안이 관찰한다면 디안은 보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조르그를 보았을 때 두 인물에게는 서로 다른 감정이 촉발된다. 


   당면한 고통, 피하고 싶은 현실로 인해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인 그조르그는 베시안과 디안에게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서 동경하는 인물의 현현이다. 그런데 그 감정을 좀 더 깊이 느끼는 인물은 관찰자가 아니라 관찰하지 않는 디안이다. “돌연 참을 수 없이 강렬하게, 이 지옥을 거쳐 갔을 남자의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조르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여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는 손에, 팔에, 날개에 죽음의 메시지를 달고 이 험준한 길을 방황하고 있었다. 태초의 어둠과 혼돈에 그렇게 맞서다니, 그는 반신의 존재임에 분명했다.”(150)


    손님을 반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산악부족들과는 달리, 디안은 그조르그를 반신의 존재로 만들어놓는다. 디안에게 다가온 손님과 같은 존재, 아름다움에 대한 피상적 동경을 현실화한 존재인 것이다. 살인자가 되었고 이제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그조르그에게는 척박하고 공허한 시간 속에 나타난 디안 또한 반신의 존재로 나타난 손님이다. 둘의 마음에 그저 똑똑, 하고 두드리기만 한 손님.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관습법, 카눈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제도이다. 언뜻 보면 미개하게도 볼 수 있는 그 제도 앞에서 우리는 알바니아인들에 대해 속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알바니아의 위대한 작가는 우리의 속단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작가 베시안과 피 관리인 마르크와 알리 비낙과 의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조르그와 디안을 내밀어준다. 


   한 편의 몽환적인 서사시를 읽는 느낌으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한동안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 서사시의 세계처럼 너무나 웅대한 울림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친 장난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