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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y 09. 2023

<물방울>

책 한 권으로 떠나는 오키나와 여행

   오키나와는 대학원 시절에 가본 적이 있다. 역사학과 교수님을 중심으로 교수님 몇 명과 동료들 몇 명이 단체를 꾸려서 갔던 것이라서 단순한 관광이라기보다는 오키나와 역사 투어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지만, 오키나와가 류큐 왕국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과 그들만의 문화적 특징이 강해서 일본이라고 하면 떠오르곤 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전쟁기념관도 들렀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어렴풋하게만 남아있다.(애초에 그 무리에 낀 것은 놀고먹는 여행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더웠고, 열대 지역의 수종들이 많이 보여서 동남아 지역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더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이 퇴색되었을 기억이 이렇게 되살아나게 될 줄은 몰랐다. 오키나와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얼결에 따라가게 된 그 여행처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사라지는 기억과 같던 그 여행과는 다르게 이 책은, 그때의 여행이 무의미하게 흩어지지 않도록 선명한 색채를 부여해 주면서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해 주었다. 


   이 책에는 아쿠다카와상 수상작인 <물방울>과 함께 두 작품이 실려있다. 오키나와의 역사, 특히 전쟁이 남긴 의미에 대해서 보여주는 세 작품은 각각의 개성이 강해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 표제작인 <물방울>이 보여주는 특별한 상황, <바람소리>가 나타내는 매끈한 이야기, 오키나와 사람들이 가진 반대 진영의 사고방식을 북리뷰라는 형식을 통해서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읽으면서, 보통 단편집을 읽고 나서 각 단편들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 인상적이긴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인 <물방울>을 자세히 “리뷰”한다.(이것은 절대 <오키나와 북리뷰>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다)

   오키나와 전쟁에 참가했던 도쿠쇼는 마을에서 만난 우시와 만나서 둘만 40여 년을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종아리가 붓는 증세가 시작되더니 발가락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의사가 진찰한 결과로도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물이었는데, 그 물을 뿌린 마당의 식물들은 신기하게도 더 잘 자란다는 걸 세이쿠가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잠든 밤이면 전쟁 때 방공호에 있던 군인들이 도쿠쇼를 찾아와서 발가락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고 간다. 도쿠쇼는 친구였던 이시미네를 방공호에 놔두고 혼자 도망갔던 죄책감을 안고 있었는데, 자신의 발가락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나서 갈증을 해소했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가는 이시미네를 보고 나서 통곡을 한다. 그 후로 발가락의 물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이상한 증세는 멈추게 된다. 한편 세이쿠는 도쿠쇼의 물을 받아서 ‘기적의 물’이라는 이름으로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도쿠쇼가 낫고 나자 그 물은 오히려 부작용만 생기게 해서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는다. 


   전쟁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로 남는다.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반인간적인 상황이며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도덕과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때라서 그렇다. 생존을 걸고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도쿠쇼의 죄책감은 인간다운 양심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의 선택을 두고 비난할 만한 일이라고 누구나 선뜻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라서, 선한 본성을 갖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는 이야기다. 


   사실 전쟁에 관련된 이런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꽤 많은 편이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 때문이다. 같은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의 갈증을 해갈해주지 못했던 죄책감을 안고 있던 도쿠쇼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물로 갈증을 해결해 준다는 설정은, 투박한 방법이긴 하지만 가장 확실해 보인다. 아무리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다고 해도 그 죄책감의 해소는 꼭 필요한 일이라서 이제야 도쿠쇼는 조금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도쿠쇼의 양심과 대비해서, 세이쿠의 양심을 볼 수 있다.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은 양심의 무게를 갖고 있더라도, 전쟁이라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너무 큰 차이를 낳기 때문에, 세이쿠처럼 뭇매를 맞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이를 작가는 잘 포착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고 특별한 상상력 덕분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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