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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20. 2024

<프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고지식한 교수님

   여기 격변의 역사로 인해 모국인 러시아에서 탈출해서 미국에 자리 잡은 교수가 있다. 미국은 처음부터 이민자의 나라였지만, 그들이 자리 잡고 난 이후에는 이제 막 적응하러 온 프닌과 같은 이민자는 은근한 놀림의 대상이 된다. 원래 텃세가 가장 심한 사람은 토박이보다 어설픈 이주민인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게다가 프닌은 진지함을 겸비한 학자라서 언어 습득에 유별난 공을 들이는데, 그 노력이 또 엄격하고도 유난스러워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미국인들은 종종 모범생 타입을 잘 놀려먹기도 하니까 그 문화적 특징을 잘 녹여냈느냐 하고 생각한다면 나보코프는 프닌을 통해서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룬 많은 소설에서 우리는 이민자의 애환과 언어적 한계와 문화적 충돌 등의 어려움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도통 그런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프닌이 그런 기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닌 혹은 화자 혹은 나보코프는 -서로 잘 분리되지 않는-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놀리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느 코미디언보다 더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유머를 구사하기 때문에 독자는 열린 마음으로 그의 유머를 따라가면 된다. 


   프닌은 인물 자체가 독특하기 때문에 서사적 재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작가는 서사적 구조도 물 샐 틈 없이 짜놓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판을 정교하게 잘 짜고 독자를 초대하는 것은 나보코프의 특기가 아닌가. 우리는 그 판 위에서 같이 체스를 두기만 하면 된다. 특별히 이 체스판은 나보코프가 독자를 배려한 것이라서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껏 웃어가면서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그의 재치를 실험해 보는 것이며, 그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낼 독자를 시험하는 것이라서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읽으면 된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 서사의 재미도 느끼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하고 모르던 것을 알게 되기도 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유희가 얼마나 재밌는지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지적 유희로의 초대이며 뇌가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는 걸 재우쳐서 다시 활기를 찾도록 만드는 정신적 운동으로의 안내이다. 가끔 독서가 지겨워지려고 할 때, 이 책을 꺼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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