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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17. 202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사랑의 지독한 진실을 보여주는 책

   마르셀의 사랑은 파국이다. 완전한 결합을 추구하는 사랑은 철저한 파국을 향한다. 마르셀은 사랑의 속성을 알고 있지만 파국을 면치는 못한다. “사회적 정념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격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제시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238)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특징도 잘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에서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베르뒤랭 씨가 나쁜 인간이라고 판단했던 마르셀은 코타르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의 영혼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풍부한 여러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생각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면 베르뒤랭 씨에 대한 평가가 나아지는 결과가 되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면 알베르틴이 보여주는 모습을 순종적인 모습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결과가 된다. 


    자신이 관찰한 결과가 인간을 판단하는 최선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관해서는 그런 생각을 동일하게 적용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그건 아마도 마르셀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마르셀에게 품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보다는 알베르틴을 거울로 사용하려고 한다. 


    알베르틴의 입장에서 마르셀을 보면 어떨까. 진실에 대한 소명을 끝없이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과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사랑을 확신하면 권태를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사랑을 느낀다는 마르셀은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바닥이 깨진 항아리다. 소유하고 싶지만 소유하는 순간 사랑이 사라지는 마법에 종속되어 있는 마르셀은 영원히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뭔가 접근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할 때만 사랑하고, 소유하지 않은 것만을 사랑하는 법이므로, 나는 이내 알베르틴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3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분리되어 있더라도 영혼의 교감과 일치를 욕망하는 인간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육체적 결합의 순간이 있더라도 그 순간은 일시적이며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 순간이 기억 속에 있더라도 그것은 타인과 분리된 나의 기억일 뿐이다. 마르셀은 분절되는 육체적 교감의 순간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영원하고도 지속적인 결합으로서의 사랑을 원하고 있다. 인간의 한계 및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적 사랑의 추구를 멈출 수가 없어서 괴롭다. 


 “나는 알베르틴을 무릎 위에 앉힌 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애무하면서 그녀의 몸을 오래 만질 수 있었지만, 아득히 먼 옛날, 대양의 소금기를 머금은 돌을 만지듯, 혹은 별빛을 만지듯, 무한에 닿은 내면을 가진 존재의 밀봉된 봉투만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육체의 분리를 설정하면서도 영혼의 교류를 가능하게 할 줄 몰랐던 자연의 망각이 우리를 몰아넣은 처지에, 나는 얼마나 괴로워했던가!”(338)


       마르셀은 끝없이 잃어버린 시간 속에 있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불일치, 욕망의 지연, 어긋남이 모두 그가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들이다.  


      “나는 그녀가 내게 키스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이 모든 것이 잃어버린 시간이며, 키스를 하고 나서야 드디어 마음이 평온해지는 진정한 순간이 시작된다는 걸 깨닫고, 그녀에게 “잘 자요, 너무 늦었어요.”라고 말했다.”(362)


   그 시간을 메우는 것은 알베르틴으로 상징되는 타자와의 결합이 아니라, 벵퇴유의 음악을 듣는 순간이나 글쓰기를 하는 순간에 더 가깝다는 걸 작가는 알고 있다. 벵퇴유의 음악과 엘스티르의 그림, 도스토옙스키의 글 등을 통해서 마르셀이 무의식 중에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술만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삶을 잘 알려주고 있고, 시간을 붙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소설의 중간에 마르셀의 입을 통해서 작가의 말이 튀어나와 있다. 


   “하지만 친애하는 스완 씨, 그때 저는 어린아이였고 당신은 이미 무덤 가까이에 있는 분이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한낱 어리석은 아이로 생각했을 존재가, 이제 당신을 자신이 쓴 소설의 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다시 당신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신은 오래도록 살아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13)


   시간을 붙들어서 그 자리에 묶어두고 한 인물을 영원히 살아있도록 만들어놓는 것이라야말로 예술의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르셀이 그토록 매혹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국 타자와의 완전한 결합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는, 최선의 대안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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