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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13. 2024

<언어의 무게>

언어의 무게를 느끼지 않으면서 잴 수 있는 방법

  “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 모든 감각이 왜 이렇게 덧없을까. 영속하는 건 왜 아무것도 없을까.”(21)


    인간은 매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매 순간 소멸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긍정하고 살아갈 수 있다. 소멸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위대한 발명이 문자일 것이다. 문자로 기록되고, 그 문자들이 소통에 이용되고, 시간을 거스르면서 오래도록 삶의 순간들이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것이 사멸하는 인간이 영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언어가 가진 무게에 대해, 엄밀히 말하면 단어의 무게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가 레이랜드의 직업을 번역가로 설정한 것은 적절하고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레이랜드가 죽음의 문 앞에 가서 언어를 잃었다가 다시 돌아와 찾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제대로 된 설정이다. 이제 그 설정 안에서 레이랜드는 충분히 자유롭게 언어의 힘과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적절한 설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면, 우리는 그 안의 메시지가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언어로 이루어진 소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이 소설을, 언어와 인간의 영속성, 존재와 소멸, 존엄한 죽음, 창작과 번역 등에 관한 만만치 않은 주제들을 모두 담은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법률가 아버지와 독일문학과 프랑스문학을 가르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레이랜드는 다양한 언어적 자장 안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언어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간다. 대학 교육에서 도망쳐서 작은 호텔의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면서도 언어에 대한 열정 덕분에 기회를 얻어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그가 장차 출판사를 이어받게 되는 리비아와 만나게 되는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자식인 소피아와 시드니가 의사와 법률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하얀 카스트’과 ‘검은 카스트’에 저항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작가가 언어를 보는 방식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레이랜드가 단어 하나의 의미를 기존의 관습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로 음미해 보고 거리를 두고 낯설게 보는 태도는 자식들에게도 이어져서, 그들도 삶의 길을 선택할 때 남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보면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생각이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레이랜드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 글을 다뤄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글로 쓴 생각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지. 나는 이제 그 생각들을 그냥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숙고하며 거리를 두고 마주할 수 있어. 생각들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나는 언제나 그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지. 글씨로 표현됨으로써 생각은 예전에 조용하고 일시적인 정신의 일화일 때는 갖지 못했던 확실성을 얻게 돼.”(162)


     레이랜드는 번역을 하면서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겠지만, 생각이 글을 통해서 박제되는 방식도 많이 생각해 왔을 것이다.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즐겁게 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올바른 언어를 찾는 일이었네.”(219)


   그리고 번역하는 순간, 글을 다루는 순간에 온전한 해방을 맛보고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맛보는 경험도 하게 된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채 번역에 열중해 모든 걸 잊었다가, 깜짝 놀라 시계를 볼 때가 있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상실감이나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이 아니야. 내 안의 시간,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살아냄으로써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행복에 겨운 놀라움이고 해방감이지.”(239)


   그런 레이랜드에게 언어를 잃어버리는 발작이 일어난 것은 엄청난 타격을 준 사건이었고, 종양이 아니라 혈액순환장애에 의한 조짐 편두통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그동안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전에는 하지 않던 새로운 결정도 내리게 된다. 리비아가 죽은 후 이어받아서 경영하던 출판사를 팔고 나서 방황하고 있을 때 그의 곁에 있어준 친구인 안드레이 쿠츠민이나 패트 킬로이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숀의 출판사를 살리기도 한다. 케네스 버크와 새로운 우정을 만들어가기도 하면서 레이랜드는 삶의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고, 그 여정은 그동안 살아왔던 번역가로서의 삶이 아니라 직접 글을 쓰는 소설가로서의 삶이다. 


   자신만의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레이랜드이기 때문에, 그가 내딛는 새로운 발걸음은 무엇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는 레이랜드가 새로 시작한 소설의 일부를 읽으면서, 소설의 의미와 효용, 문학의 영원함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언어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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