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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13. 2024

<개와 늑대>

개와 늑대 사이에서 빛나는 여인

   소설을 읽으면서 재밌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매력적인 인물을 만났을 때다.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색다른 면을 찾을 수 있고, 이상하게 끌리는 인물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아다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엄마 없이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던 아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야망을 가진 숙모의 손에 이끌려 사촌들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숙모의 손에서 자라면서도 좀처럼 굽히는 법이 없어서 더 큰 구박을 받게 되지만, 그게 바로 아다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져도 그런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아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어릴 적 한 번 보고 사랑에 빠진 해리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해리를 향한 사랑은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현실은 벤과 결혼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아다는 결혼 후에도 해리를 사랑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내면에 이처럼 정신 나간 꿈들을 품고 있잖아…. 아니면 오로지 유대인들만 그런 걸까? 우리는 탐욕스러운 종족이고,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려서 현실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132)

   

   사랑 이야기로 본다면 아다와 해리, 벤의 관계는 삼각관계에 불과하지만, 아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본다면 해리를 향한 아다의 마음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거대한 꿈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제로 해리와 이어졌을 때 아다는 해리에게 한 여자가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체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다는 해리의 도움을 거절한다. 자신의 영혼이 해리의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리의 도움을 받는다면 종속되는 위치 또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영혼은 매력적이다. 삶이 무엇을 던지든 스스로의 힘으로 받아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걸 암암리에 내뿜고 있고, 아다에게서 그걸 느끼고 있는 벤과 해리는 그녀에게 매혹될 수밖에 없다. 물론 각자 다른 방식으로 느끼긴 하지만 말이다.  


   “난 그래도 자유롭잖아요. 마음 내키면 종일 작업을 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누구 하나 걱정하거나 혹시 어디 아프냐고 묻지 않아요.… 어쨌거나 그것이 내가 누렸던,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에요.”(216)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아다는 도망치지 않고 맞설 수 있고 심지어 해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 전적인 희생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고 나서 자기만의 힘으로 일어선다. 동유럽 어느 곳에서 살아내면서 그곳의 여인들과 연대한다. 아다는 그런 힘이 있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림, 자식, 용기. 이거면 살 수 있어. 그것도 아주 잘 살 수 있어.”(326)


    여성 서사로 읽어내면 이 소설은 이렇게 매력적이고 강인한 아다와 같은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유대인 서사로 읽어내면 아마도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눈에 걸릴 것이다. 


   “모든 유대인이 그렇듯, 해리는 유대인 특유의 결점과 마주할 때면 기독교도보다 더 예민하고 격하게 눈살부터 찌푸렸다. 갈망하는 것을 얻으려는 그 끈질긴 에너지, 거의 본능적인 욕구, 주변의 눈치를 볼 줄 모르는, 체면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뻔뻔함, 그의 정신 속에서 이 모든 건 ‘유대인의 불손’이라는 오직 하나의 이름표 아래 정리되었다.”(186)


   삼각관계로 얽힌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재밌는데, 장황하지 않은 묘사와 빛나는 문장들이 함께 해서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 가능한 소설이 재밌고 빠르게 읽히고, 20세기 중반에 나온 소설이 여전히 세련된 느낌이 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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