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릿책방지기 Apr 15. 2024

<순수 박물관>

사랑을 박물관에 넣는다는 것의 의미

   사랑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아름답지는 않다. 사랑이라는 정의는 제각기 달라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은 제한적이다. 사랑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라서, 보편적 이야기가 되려면 그에 맞는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이 사회적 기준이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와의 별개로 말이다. 더해서 아름다움까지, 문학적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는 사랑은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다. 이미 결혼할 여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관습과 사회적 기준 앞에서 주저하는 사이에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 남자는 파혼한다. 파혼한 남자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기다린다. 기다림 끝에 결국 여자는 이혼하게 되고 둘은 맺어질 수 있게 된다. 


   이야기만 빼놓고 보면 엇갈린 사랑 이야기이며,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는 사랑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야기가 남자의 입장에서만 쓰였다는 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700페이지를 읽어나가는 동안 알 수 없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는데, 그제야 이 사랑 이야기가 진정한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어쩐지 남자의 지극한 사랑 고백에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슷한 듯 하지만 매우 다른데, 케말이 퓌순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변화시켜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부유한 남자가 평범한 소시민 여자를 사랑한 이야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퓌순의 입장에서 보면 케말은 자신의 운명을 계속 가로막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퓌순은 사랑에 빠져서 당시의 정조 관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케말과 육체적 관계를 맺었고, 그건 순전히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케말이 약혼한 사이라는 걸 알지만 자신에게 온 사랑의 감정을 거부하지 않는 점에서 용감한 여자다. 이후 케말의 선택을 기다리면서도 강요하지 않는데, 그 덕분에 케말은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만약 퓌순이 영악한 사람이었다면 –퓌순의 친구 제이다의 경우처럼- 케말이 파혼하고 자신과 결혼을 결심하도록 좀 더 머리를 굴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퓌순은 케말의 약혼식에 가서 그의 선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받아들인다. 


   케말의 정부가 되어서 사느니 마음이 아프더라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대신에 배우가 될 꿈을 꾸면서 운명을 다른 방향으로 개척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케말은 퓌순의 욕망과 성취를 이뤄주는 사랑을 하는 인간이 아니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케말에게는 아마 그런 식의 사고방식의 전환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퓌순이 결혼을 앞두고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을 정말 납득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케말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전시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신의 수집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퓌순의 생각과 마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순수 박물관”은 누구를 위한 “순수”이며, “박물관”인지 명확해진다. 작가의 의도는 케말이 순수한 사랑을 자신이 수집한 물건들을 통해서 그곳에 박제해 두고 영원불멸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시선을 바꾸어서 퓌순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순수했던 퓌순의 불행했던 삶이 그곳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뿐이다. 이 소설이 튀르키예의 사회적 문화적 한계 안에서 불행할 수 없었던 퓌순의 삶을 “순수하게” 전시한 “박물관”으로서의 “순수 박물관”의 의미라고 한다면 동의할만하다. 하지만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지독한”의 의미에 좀 더 부정적인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1975년경의 튀르키예의 문화와 삶, 약간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은 하나의 소득일 수 있다. 그리고 몇 줄로 요약될 만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고 장황한 서사로 만들었음에도 그리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것은 작가가 가진 이야기꾼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로 분류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인상적인 문장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박물관의 이 지점에 전시될 수 있도록 화가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하며 주문했던 이 그림은, 퓌순의 집안에 켜져 있는 전등으로 인해 오렌지 빛이 나는 창문, 달빛이 비쳐 가지가 반짝이는 밤나무, 굴뚝과 지붕이 수 놓인 니샨타쉬 하늘 너머 군청색 밤의 깊이를 무척 잘 반영하고 있지만, 그 풍경을 보고 있을 때 느꼈던 나의 질투심까지 박물관 관람객들에게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111)

   “이스탄불 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로에게 총질을 하고, 은행이 털리고, 폭탄이 터지고, 찻집이 기관총으로 난사당할 때, 우리가 뭔가 신비스러운 고통 때문에 그 세계를 모두 잊는 것이 시벨에게는 어떤 심오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267)

   “갈수록 확장되는 아버지의 사업과 공장, 더 커져 가는 부유함에 어울리는 존경스러운 ‘서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가 나를 삶의 단순하고 근본적인 면에서 멀어지게 했으나, 지금 이 뒷골목에서 내 삶의 잃어버린 중심부를 찾은 것 같았다.”(323)

   “하지만, 케말 씨, 인생은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요.”(353) - 퓌순의 친구인 제이다의 말

   “이제는 퓌순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찍을 영화에 내가 돈을 대기 때문에, 그러니까 돈 때문에 나와 친구로 지내는 사람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411)
    “이 세계의 기본적인 특징은 ‘시간 밖’에 있다는 것이었다. 타륵 씨가 아내에게 “시간을 잊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였던 것이다.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케스킨 씨 가족의 오래된 물건들, 특히 고장 나고 녹슬고 오랫동안 작동하지 않은 자명종과 손목시계를 보면서, 그것들이 얼마나 기이한지, 얼마나 ‘시간 밖’의 존재로 보이는지, 어떻게 자기들끼리 그들만의 시간을 만들었는지 봐주었으면 한다.”(429)
    “내게 있어 행복은 이처럼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432) - 박물관의 의미

   “물건들의 힘은 그 안에 쌓인 기억만큼이나 우리의 상상과 기억력의 추이와도 연관되어 있다.”(482) - 박물관의 의미

   “나는 내 인생에서 아무것도 고집 피운 것 없어, 케말. 명예와 자존심이 짓밟혔을 때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뿐이야.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는데,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해. 왜냐하면 난 결심했으니까.”(643) - 퓌순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

   “게다가 난 절대 그들처럼 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유명해져서 너희들을 떠날까 봐, 질투심 때문에 날 집에 붙들어 두었어.”(715) - 퓌순이 말하는 자신의 삶

   “우리의 박물관은 부자들이 자신을 서양인인 양 느끼게 해 주는 환상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 줘야 합니다.”(767) - 박물관의 의미     

매거진의 이전글 <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