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전 글쓰기를 통한 사회 비판
아니 에르노를 먼저 알고 있었고,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갖추고 있던 상태에서 디디에 에리봉의 책을 읽고 나니 아니 에르노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던 부르디외의 담론을 사회학자의 문장으로 읽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전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렇지만 자신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사회적 담론과 연결해서 이렇게까지 촘촘하게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개인사를 통해 이 정도의 성취를 이뤄냈다는 것은 피에르 부르디외를 비롯해서 푸코의 선례가 없었다면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시사에 대한 놀라움은 푸코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보여준 철학과 실천을 비롯해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탄생시킨 사회의 문화적 배경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 부럽지 않았다면 진실하지 못한 것이며 이 책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와 비교하게 되는 부분은 자전적 글쓰기를 픽션이라는 장르로 녹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개인사를 가십으로 소화할 수도 있는 약간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디디에 에리봉은 선명한 사회비판적 태도를 지적 체계로 녹여냈기 때문에 에르노가 가진 위험성을 조금은 피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책이든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 책의 가르침은 일상에서 품고 있던 의구심들을 언어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에 있다. 각자도생을 내면화하고 있는 나라에서 살면서 여러 사회 현상에 대해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불편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알게 해 준 것이 가장 고마웠던 점이다.
“새로운 정치철학은 ‘자율적인 주체’를 예찬하고, 역사적·사회적 결정요인들을 중시하는 사유에 종말을 고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유의 주된 기능은-‘계급’ 같은-사회집단들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해체하고, 이렇게 해서 복지국가와 사회보장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노동권과 연대 및 재분배 체계의 개인화(혹은 탈집단화, 탈사회화)가 불가피하다는 미명 아래 말이다. ‘집단주의’에 맞서 개인적 책임을 앞세우는 이 낡은 담론과 기획은 이전까지 우파의 것으로, 우파에 의해 강박적으로 지겹게 되풀이되어 왔는데, 이제 좌파 역시 상당 부분 공유하게 되었다.(147)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개인에게 무한에 가까운 책임을 묻고 있는 것에 대해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개인은 사회집단의 일부일 뿐이고 사회집단이 사회적 결정요인들에 결코 자유로운 수 없다는 걸 시원스럽게 알려주고 있다. 아비투스의 개념을 배우면서도 그것으로부터 확장된 개념까지 갈 수 없었고 사회 문제와 이론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망으로 남아있던 많은 것들이 이번 독서를 통해서 해소된 느낌이었다.
작가가 계급의 문제뿐 아니라 성정체성의 문제까지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한때는 감추고 싶었던 가족의 역사와 사회적 배경에 대해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각한다. 그동안 갖고 있던 자전적 글쓰기에 대한 은밀하고도 부정적인 감정은 픽션을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힘인 상상력의 정수라고 봤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라는 것을.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 역사적 시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이다. 노동 계급은 변화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노동 계급은 1930년대나 1950년대의 노동 계급과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일한 현실, 동일한 열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