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연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유럽의 소설들을 통해서 세계대전이 유럽인들에게 근대 이후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다는 것과, 그 전쟁이 남긴 상처가 그들에게 근본적 트라우마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그 전쟁의 수혜자나 다름없는 미국인이 세계대전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것은 조금은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영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걸 확인하고서 깜짝 놀라게 된 것은 그런 생각 때문이다.
아마도 치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쓴 소설일 테지만, 정말 영국인이 쓴 소설이 아니라는 걸 믿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만큼 건지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 시대의 이야기를 정말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야기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개성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서간문 형식을 사용한 것이 가장 뛰어난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내용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풍부한데, 줄리엣 애슈턴이 도시 애덤스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그리고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사람들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끼어드는데, 그들의 중심에 있는 엘리자베스 매케너가 줄리엣이 쓰려는 글의 주인공이 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고받는 편지글로 사건이 계속 이어지다가 뒷부분에 이솔라 프리비의 비망록이 일기 형식으로 들어가 있다. 만약 줄리엣이 화자로 설정되었다면 이야기가 좀 더 단순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북클럽 사람들을 비롯해서 줄리엣에게 청혼하는 마크, 친구인 소피, 출판사 대표인 시드니와 비서인 수전까지 모두 편지라는 형식으로 목소리를 내주기 때문에 보다 복잡하고 풍성한 느낌이 든다. 이솔라의 노트는 형식의 변화를 통해 재미를 더해주기 위한 깜찍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물론 각 인물들의 목소리가 잘 구분되지 않는 편지도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편지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일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재치와 위트를 빼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 소설에 큰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나는, 모든 것이 책과 연관되어 있는, 책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이는 이런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껏 책에 관해 이렇게 아름다운 연서는 본 적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