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열망하며 찾아가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자기 정체성에 대해 죽을 때까지 고민한다는 점이 떠올랐을 때다. 사자가 사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거나 도롱뇽이 도룡뇽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세계에서도 각자의 차이가 존재하고 주어진 행운이 다를 텐데 그 부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고, 우리가 언제가 듣고 보고 읽게 되는 것들은 결국 자기 정체성에 관한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왜 나인가, 혹은 나는 왜 이런 나일 수밖에 없는가의 문제에서부터 나는 왜 다른가, 차이는 필연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정말 이상하고도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더해서 그런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써서 자기 확신을 얻으려고 하고,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고 차이를 좁히려는 시도를 하는 것들을 볼 때마다, 이런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솟아난다. 정체성을 고민해야만 하는 타고난 괴로움은 있지만 그것을 어쨌든 고양되고 승화된 방식으로 표현해내려고 하는 모습들에서 연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작가인 노먼 에릭슨 파사리부는 이름부터 낯설어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쩐지 먼 나라의 신선한 이야기가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 낯설어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길 기대하는데, 작가는 두 가지 기대를 동시에 충족하고 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고민하는 정체성의 문제와 가족 문제와 종교 문제를 비롯해서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아픔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를 가지고 재밌는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당신의 긴 잠을 위한 잠자기 전 이야기>와 <거인에 관한 이야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알람맨과 파룰리안의 이야기는 설화인 듯하면서도 현재 주인공의 상황과 잘 섞여서 주제를 명확하게 해 주는데, 지역적 특색이 살아있어서인지 신비로운 느낌도 든다. <젊은 시인이 가슴이 찢어지고 나서도 살아남기 위한 안내서>, <셋은 당신을 사랑하고, 넷은 당신을 경멸한다>, <짙은 갈색, 검정에 가까운>, <그 여자의 이야기>와 같은 작품들은 소품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작가의 실험 정신과 재기 발랄함을 엿볼 수 있다.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와 그로 인한 각자의 입장, 가족과 사랑의 문제를 가장 잘 풀어낸 작품들은 <산드라,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거인에 관한 이야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 <우리의 후손은 하늘의 구름만큼이나 많을 것이다>와 같은 것들인데,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비롯해서 가족의 문제를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그 한계를 구원해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는 것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와 <아드 마이오렘 데이 글로리암(신의 더 큰 영광을 위해)>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서로의 경계를 넘기가 힘들고 서로가 서로의 사이 속에서 고통받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서로를 구원하지 않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이 단편집은 하나로 관통하는 정체성에 관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퀴어 문학의 스타일에 지친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