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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Apr 06. 2024

<빅 서>

삶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품은 알코올중독자의 노래

“인간 세계에서 무명으로 사는 게 저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대체 저 세상이란 뭔가? 이 지상은 뭔가? 모두 관념이 아닌가.”(길 위에서 2, 108)


   예술 작품은 그 작품 자체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작가를 알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나을 때가 있다. 작가 그 자체가 작품이 된 경우인데, 대표적으로 프루스트를 들 수 있다. 그가 만든 주인공 마르셀은 프루스트 자신이기도 하면서 프루스트가 보는 자신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프루스트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잭 케루악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잭 둘루오즈도, 그의 대표작인 <길 위에서>의 샐 파라다이스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출판업자의 반대로 같은 인물들을 다른 작품에 등장시킬 수 없었을 뿐, 그가 바라던 것은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잭 둘루오즈 하나로 모두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잭 둘루오즈는 가련한 자기 자신의 모습인 동시에 그가 바라본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잭 둘루오즈를 보면서 당연히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된다. 

   “당장 손을 써야지, 안 그러면 난 끝이야.”라고 외칠 정도로 파멸에 이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잭 둘루오즈가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찾지 못한 채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가 무절제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빅 서로 피신해 갔다가도 6주 만에 탈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빅 서의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가 그토록 무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을 완성했을 때는 1962년, 잭 케루악이 마흔이 된 나이이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고의 물질적, 과학적 혜택을 받아오던 미국 전후 세대들의 방황이 끝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화적 토양이 없던 곳에 갑자기 쏟아진 물질적 풍요로움은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는 비트 세대를 낳았는데, 비트 세대의 기수였던 잭 케루악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평범하고 조용하게 삶에 안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기대는 여전하고,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작가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도시에 계속 남아있으면 기존 생활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빅 서의 자연으로 들어갔지만, 이제는 인간의 거대한 욕망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삶에 대한 생각들 또는 숲 속에서의 명상, ‘궁극’ 어쩌고 하는 것들과 이를테면 저녁밥 짓기나 “이제 뭘 하지? 장작을 팰까?”라고 말하는 것 같은 온갖 보호 장비를 박탈당하고 알몸으로 서 있는 느낌과 함께,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기 위해 다음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 나 자신을 기만해 왔을 뿐,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병든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독한 깨달음이 엄습해 왔다. … 바다는 내게 “네 욕망으로 돌아가, 여기서 미적거리지 말고.”라고 말하는 것 같다.”(56-57)


   궁극적으로 정신적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자연과의 교감이 아니다. 물질문명 시대 이후 더 이상 초월적인 세계와 교감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미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인간에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뻥 뚫린 내면을 채우고 싶은 갈망 앞에 널려있는 것들은 알코올과 마약, 섹스이고, 취해있는 세계에서 그 순간만큼은 초월적 세계와 조우하는 느낌이 들고,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다. 깨어나는 순간만이 괴로울 뿐이다. 


   그가 그토록 토니에게 끌리는 이유는 엄청난 열정으로 보이는 삶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그 힘에 잭은 매료되지만 삶에 적절히 안착하는 방법만큼은 배우지 못한다. 잭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세상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세상을 어떻게라도 사랑하고 있을 때 나는 자신이 자랑스럽다. 그에 비하면 증오는 훨씬 쉽다. 그런데 지금 나는 세상 한심한 증오에 목까지 깊이 빠져 잘난 체하고 있다.”(160)


   그가 갖게 될 낙원이란 결국, 취한 채 극심한 망상에 빠져서 보고 듣고 기억해서 쓰는 것이며, 그것들만이 “영원히 금빛”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빅 서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파도 소리를 듣고 쓴 시는 그 어떤 문장보다 더 취해 있는 느낌이다. 작가가 피를 토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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