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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Apr 03. 202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법에 대하여

   이십 대 중반쯤 남자친구를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과 청계산을 오른 적이 있다. 만날 때마다 술만 퍼마시지 말고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자며 등산을 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에 등산이란 활동은 중년을 넘어선 어르신들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의미 있는 활동”에 전시회와 공연 관람만 줄기차게 제안하는 나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남자친구와 남자사람친구들이 차라리 등산이 낫다는 생각으로 감행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십 대라고 해도 대학교 입학 이후에는 일 년에 369일을 술만 마셔대던 우리들에게 청계산 등반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라서, 정상까지 오른 사람은 단지 세 명뿐이었다. 낙오한 친구들을 비웃는 즐거움에 취해서 정상에 선 세 명은 마치 히말라야 정상을 찍은 것처럼 난리블루스를 쳤으니 주변 어르신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상 표지석을 붙들고 온갖 이상한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우리를 지켜보던 한 중년 부부가 슬쩍 다가오는가 싶더니, 우리에게 오렌지 한 개를 내밀었다. 우리의 행태를 보면서 당시 오렌지족이 유행이라 연상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오렌지족이라기보다는 낑깡족을 흉내 내는 조무래기들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우리는 선명한 빛깔의 큼지막한 오렌지를 주시는 그 손길에 대고 ‘이게 뭐예요?’라며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중년의 부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냥 예뻐서 주는 거예요.’하고 질문에 그리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대답을 해주었는데, 그 대답은 훗날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한 후 탐스러운 오렌지를 볼 때나 싱그러운 젊음을 아무 생각 없이 흩뿌리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볼 때 자주 떠오르게 된다. 그 대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그 중년 부부의 나이 정도가 되어보기 전에는 그 상황의 의미를 결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가역적 시간의 폭력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유약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또한 시간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타인의 눈에도 청년이 아닌 신사로 보이는 마르셀은 오랜만에 간 사교계에서 낯선 인물들을 만나며 ‘시간’과 본격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새로 유입된 인물들도 많지만 어딘가 낯이 익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인물들도 많다. 심지어 그의 첫사랑이었던 질베르트조차 살찐 여인으로만 보여서 블로크의 도움을 받아서야 이름을 기억해 낸다. 마르셀이 떠나 있던 시간 동안 사교계에서는 세대교체가 일어났으며, 이름만으로도 흠모의 대상이던 귀족들은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거나 너무 나이가 들어버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고, 사라질 일만 남은 상태에서 마르셀은 이제야 정말 작가가 되려고 한다. 이제는 쓰지 않으면 더 이상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절감한 탓이기도 하고, 그가 항상 사랑하던 예술의 본질이 그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 덕분이기도 하다. 그가 알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른 후에 만났을 때 도저히 동일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 사실 앞에서, 그가 추구해야 하고 보여줘야 할 작품의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이유가 내 고뇌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예술 작품을 통해 초시간적 실재를 규명하고 지적 분석을 시도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시간’의 파괴적인 활동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132) 


   필연적으로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시간들을 모두 무의미하게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만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든 모습으로 나타난 얼굴들이 낯설었던 이유는 우리의 인식과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파편화된 순간 속에서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아우르는 시간의 의미라서, 파괴적인 시간의 활동에 맞서서 영원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그 의미를 박제해서 고정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글쓰기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걸 발견해 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활동이며, 잃어버릴 시간에 맞서는 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과거로부터 온 순간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어, 내가 자신 속으로 깊이 내려가기만 하면 여전히 그 순간을 되찾고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328)


   우리는 그가 발견하고 써 내려간 것들을 읽으면서, 우리 각자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된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서글픈 마음을 뒤로하고 오렌지를 건네던 중년 부부를 떠올리면서 그 순간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된다는 것은, 시간은 인과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편적이라서 우리가 그 순간을 떠올리고 되찾는 것으로도 잃어버렸던 시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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