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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y 25. 2024

<아빠가 엄마를 죽였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소설의 자세

   “과연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121)


   남편과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 각자 보고 있는 대상이 매번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번화한 길을 걸을 때는 번잡해서 그렇다고 해도 단순한 숲길을 걸을 때도 보는 것이 다른데, 남편은 주로 작은 야생동물을 잘 목격하는데 반해, 나는 나무이파리나 꽃, 작은 풀 같은 것을 본다. 그 차이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각자 관심의 대상이 달라서 보게 되는 것도 다르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잘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대상일 수도 있다. 


   여름에도 긴 팔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여자가 자외선을 가리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관심사가 아니라서 안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보이는 것들이, 몰라서 혹은 일부러 보지 않는 것도 많다. 이 소설은 가정폭력에 의해 끔찍한 트라우마를 얻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웃인 베르종 아주머니와 아버지의 친구, 헌병대 소위가 꼭 봐야 할 것을 보지 않아서 일어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는데,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는 그만큼 가부장의 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익숙해져 있다. 그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써서 우리에게 내놓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데 작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잘 선택한 것 같다. 


   아빠가 엄마를 죽였고, 아이가 그 장면을 목격했고, 목격한 아이의 오빠가 이 사건에 대해 서술한다. 오빠는 미성년도 아니고 성년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열아홉의 나이이다. 아마 열세 살인 레아가 화자였다면 우리는 충분한 정보와 의미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사자인 가족이 아니라 외부인이 화자였다면 우리는 좀 더 멀리 떨어져서 보게 되었을 것이다. 레아가 끔찍하고 무서운 사건의 목격자이고 ‘나’는 사건에 대한 전달자 역할을 하는 화자로 설정한 것은 영리한 설정이다. 열아홉의 ‘나’가 직접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건이 터진 후, 화자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모라는 맥락에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 타자화시켜서 보는 것도 좋은 설정이다. 관계의 맥락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거리를 두고 보는 순간 보이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본다고 해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작가가 이 사건과 인물을 객관화시키려는 노력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주변인들의 반응을 다양하게 설정한 것은 문학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더 확보하게 된다. 이웃 아주머니의 죄책감과 아버지 친구의 후회를 비롯해서 헌병대의 방어적 태도까지 보다 보면 우리는 어쩌면 그중 한 명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문제의식에 동참한 독자는 서사의 흐름에 더 깊이 들어가서, 마침내 이르게 되는 소설의 의미인 “유일무의한 존재였던 나의 어머니는 그 순간 모든 여성이 되었다.”(211)에 자연스럽게 동의하게 된다. 


   이것은 세실 모랑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프랭크 말지가 사이코패스라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다. 두 사람이 자라왔던 환경을 들여다보고 성격과 주어진 상황을 모두 고려해 봤을 때, 남편의 폭력적 행동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아내는 참아내야 했던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낸 일이다. 어떤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사건이 그 여성만의 개별적이고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여성의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그 의미를 향해 치밀하게 잘 조직해 왔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소설은 언제나 예술로서의 기능과 함께 사회적 문제의식을 고양하는데 일조해 왔는데, 이 소설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건을 뉴스 기사의 한 면에서 읽는 것과 소설로 읽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나면 보는 대상을 확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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