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얻게 되는 것과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하여
아주 잠깐 레이먼드 카버가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앤드루 포터가 미국 작가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나. 거의 모든 단편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등장해서, 알코올중독자였던 카버가 떠올랐던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마도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는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겹친 것일까.
마흔이 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생기고 나면 삶의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를 실감하게 되는 때는 젊었지만 젊음을 실감하지 못하면서 누리고 있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일 것이다. 그들이 이전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로 삶을 유지하고 있다면 문득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으며, 난 어디로 간 것인지에 대해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명백히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과거의 나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도 아니라, 그저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된다.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사라진 것들』에서는 그 달라진 것들, 사라져 버린 많은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떠돌고 있는 중이다. 현재의 선택이 어떤 것이든 간에 사라져 가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므로 그 감정들은 일상에서 불쑥 찾아들곤 한다. <넝쿨식물>에서 사이먼은 마야와 함께 살면서도 누군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야도 자신에 대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그 시절은 단지 인생의 다른 부분”(64)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조차 해당되는 생각이다. 인생의 지나간 어떤 시절의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자신과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시간이 많은 것들을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줄라이 줄라이』에서처럼 시간의 폭력 뒤에서 각기 다른 운명을 거쳐 온 인물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생생하게 겪어내고 있는 인물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주로 일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으며 각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대체로 40대의 남성이라는 점이 동일해서 마치 모든 인물들이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첼로를 연주하지 못하는 아내를 무력하게 관찰하거나, 연인 사이에 조율자처럼 끼어 있거나, 아이를 지나치게 걱정해서 공황발작을 일으키거나, 정교수가 되지 못한 열패감에 이웃 부부의 사소한 물건들을 훔치거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내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거나, 나를 부양하는 아내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웃집 젊은 여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중년 남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사회에서 낙오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성취를 맛보지 못한 상태에서 생활과 문화의 수준은 중산층에 가까워서 어딘지 모르게 불일치한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어쩐지 파트너나 주변인들이 대신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불일치에 대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균열의 감각을 덮기 위한 일상의 위안이 필요하다. 그런 감정들을 가라앉히는 것은 약간의 술이다. 그들은 외면하고 덮어버리고 시간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 엉망진창으로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게 아니라 시간을 견디기 위해 마시는 술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현대적 삶의 전형적인 표본으로 보이기도 한다. 취해서 망가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삶이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더 쓸쓸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