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끓는 젊음이 바라본 자신의 기원
소설은 정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얼굴은 작가 자신의 모습인 것 같다. 허구적 변형을 거친다고 해도 역시나 소설은 작가의 분신과 같아서 읽다 보면 그 작가를 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수없이 많은 작가의 숫자만큼 다양한 얼굴의 소설을 보게 되고,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읽는 행위가 의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읽지 않았다면 모로코라는 먼 나라의 어떤 작가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고, 모로코라는 지명은 추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어떤 지역이나 국가가 구체성을 띄기 시작하는 계기는, 직접 방문해 보았거나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상을 보았거나 그곳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인데,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글을 읽는 행위가 조금 더 공을 들여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화자가 보여주고 있는 모로코의 상황은 모로코의 일부일 것이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알 수 있다. 라마단 기간과 수많은 거지들과 여성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과 프랑스 문화가 공존하는 것과 돈 많은 아버지의 이름만 대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것 등등 말이다. 게다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의 타락과 부유함, 프랑스 신부의 무책임함과 무신경함, 인종적 편견 등도 알게 된다.
화자인 드리스 페르디가 스스로를 군주로 칭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격렬하게 반항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하는데, 아버지라는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에게 낯선 세계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할 생각을 품는 드리스는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의 사상과 문화를 공부했기 때문에 자기 세계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비판적 인식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자기 근원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이중적인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언제나 보아 왔던 그의 모습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바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57)
드리스의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처럼, 혹은 모로코의 무질서한 거리처럼 이 소설의 문장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한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걸 한 번에 다 담으려다가 과잉상태가 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단점을 직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 소설 자체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쫓겨난 드리스는 프랑스 친구들과 선생들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마치 모로코를 개방시키고 발전시키면서 도움을 줄 것처럼 들어왔던 프랑스처럼 말이다. 결국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드리스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아, 그래! 소녀야. 내가 아는 것처럼,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처럼, 시간은 나의 절대자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시간이 나에게 이미 확인시켜 줬다. 나는 더 이상 동양인이 아니다. 그래서 내 일부를 잘라 낼 수도 없고, 무게 중심에서 서서 평형을 유지하거나 거기에 피신할 수도 없다. 시간은 나에게 나는 소설의 등장인물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쩔 수 없지, 소녀야! 나는 내가 역시 거기서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말이야.”(263)
결국 군주가 그려놓았던 큰 그림대로, 그가 일궈놓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반항은 힘없이 끝나게 된다. 용두사미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소설은 끝이 나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로코의 어떤 일부가 엉켜서 자리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