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전혀 다른 소설의 매력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대체로 원작을 먼저 보고 나서 영화를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든 원작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하게 만들었든 상관없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상을 통해서 본 이미지의 강렬함이 문장을 통한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한된 상상력은 의식적으로 분리하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이미지를 기억하며 비교하려 하고, 비교하는 과정은 문장의 힘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 <색, 계>에 원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영화를 미리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짧은 단편이었던 원작 「색, 계」는 영화에서 보던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공 왕지아즈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좀 몽롱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느낌이 들었던 이유를 작품집에 수록된 다른 단편들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작가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하나의 꿈과 같은 순간, 찰나의 진심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만큼은 진실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작품들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비롯한 어떤 숭고한 감정이라도 일장춘몽처럼 느낄 뿐이다.
「색, 계」에서 왕지아즈는 대의를 위해 스파이의 길을 선택하고 나서, 이 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명징한 목적을 인식한 순간 좀 더 후련하고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다. 그 목적은 이 선생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 소설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아즈는 자신이 대의적 목적에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무의식적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이 선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 인식은 비틀어진다. “사실 이 선생과 함께할 때면 뜨거운 물로 씻는 듯 응어리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행동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26)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아즈가 말한 목적은 자신과는 무관한 바깥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삶의 목적이자, 사랑이다. 그걸 발견하게 된 것만으로도 지아즈에게는 충분하다. 거칠게 일반화해서 국가와 개인,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을 때 지아즈는 자신을 선택한 셈이다. 영화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지아즈의 심리의 흐름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선생조차도 자신의 선택에 인간적인 이유를 붙이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런 대목에서 작가가 인물을 얼마나 다면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는지, 당대의 이념으로 박제되었던 인간들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함께 수록된 단편들을 통해서도 작가의 일관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지아즈를 통해서 대의로 포장된 개념과 개인적 감정의 차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선상에 둔 것처럼, 「증오의 굴레」에서 자인과 자인의 아버지, 자인의 연인인 쭝위를 통해서 사랑과 증오 또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봉쇄」에서는 사랑에 빠진 감정조차도 전차 안에서 봉쇄된 상태에서 잠깐 동안의 비이성적 꿈을 꾼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차에 불이 들어왔다. 추이위안은 눈을 뜨고 그가 원래 앉아 있던 멀리 떨어진 자리를 쳐다보았다가 충격에 몸을 떨었다. 그는 전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쭝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봉쇄되었을 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란 의미였다. 상하이 전체가 졸면서 비이성적인 꿈을 꾸었다.”(186)
「붉은 장미 흰 장미」에서 전바오가 전통적 방식의 사랑인 멍옌리와 새로운 방식의 사랑인 자오루이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광기의 상태에 이르는 것과 「정처 없는 발길」의 뤄전처럼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작가의 영혼도 자신의 삶처럼 부유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한다.
어쩌면 그런 작가의 특성 덕분에 우리는 1950년대라는 당대의 한계를 벗어나서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가진 인물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당대성이라는 것은 그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시간을 조금 비껴가서 보면 상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라서, 그 안에서도 보편적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일 것이고, 장아이링처럼 그것을 이루어낸 작가야말로 오래도록 다시 읽히게 되는 것 같다.
“두 사람의 일이 흐릿한 꿈속처럼 영원히 이 방에서만 맴도는 게 아닌가 싶었다. 꿈속의 시간은 아무리 길게 느껴져도 실상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영원히 지속되고 서로를 아주 오랫동안 알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웠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쭝위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 마음은 당신 자신만 알겠지요.””(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