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외부의 시선과 타자들의 목소리는 들어왔지만, 베트남 사람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주로 여성 화자를 내세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남성 화자보다 다양한 형태로 경험한 여성 화자가 다각도로 전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여성 화자를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다 부드럽게 품으며 승화시키려는 시도가 보이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랑하의 밤>은 대놓고 미국인에게 베트남전에 패배한 이유를 자신들의 글을 통해서 찾아보라고 한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액자 안에 있는 소설이 미국인 존 마크에게 베트남 사람들의 심혼을 알게 해 준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얼굴이 망가진 채 돌아온 쯔엉은 고향인 랑하 마을에서 그리워하던 음식을 먹고 하룻밤을 보낸 후 자신의 아내인 트엉을 놔두고 떠난다. 그 이야기를 통해 존 마크는 베트남 사람들이 전쟁을 버틴 이유를 알게 된다.
이후에 이어진 소설들도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이어져 있다. <처녀의 강>에서는 군인과 만나서 미혼모가 된 엄마의 이야기나 나오고, <쩌우강 나루터 사람>은 전쟁에 참전한 머이 이모의 이야기가 나온다. <쩌우강 나루터 사람>은 베트남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하는데, 머이 이모가 자신의 약혼자인 산 아저씨의 결혼식 날에 전쟁에서 돌아온 후 산 아저씨의 아이가 무사히 출산하도록 도와주고 강 속 포탄에 죽은 바 숙모의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된다. <야간열차>에서는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잠든 화자가 북베트남 사람들이 모은 돈을 남부로 가져가는 수송 임무를 맡았다가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에 처한 것을 소수민족인 소녀가 구해준 이야기가. 소녀의 아버지가 나병에 걸려 숨어 살던 중이었던 터라 화자는 소녀와의 사랑을 거부했고 그런 과거를 후회한다. <옛날 숲 입구>는 전쟁 중 만난 첫사랑 싱을 잊지 못하는 여성 화자가 나오는데, 결혼했지만 죽은 싱을 잊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야기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신파적이다.
특별히 <톤레사프 강가에서>와 <숲속에서>에는 베트남 전쟁뿐 아니라 캄보디아 내전에 참전한 모습이 나온다. <산마루의 천둥소리>에서는 몽족 마을 이야기가 나오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이렇게 보여준다. “하얀 서양인이 검은 서양인보다 더욱 잔인했다. 검은 서양인들은 간을 먹지 않고 얼굴을 돌리며 눈시울을 붉혔다.”(169) <붉은 단풍잎>에서는 프랑스로 간 미엔이 여전히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엔은 무의식적으로 저 어두운 단풍나무들처럼 옛날 어두웠던 밤의 정글이 생각났다. 가로세로 강철로 된 에펠탑은 미엔이 발광 물질에 오염된 정글 나뭇잎이 바람이 세게 불 때 번쩍번쩍하며 떨어지던 모습, 어두운 밤에 호색으로 말라버린 기둥만 남은 마루를 연상시켰다.”(187) <열세 번째 나루터>에는 고엽제 피해 이야기가 나온다. 사오와 랑 부부가 고엽제의 피해를 입고 사산만 하다가 하반냉이 아이를 얻기 위해 새 아내를 들인 것을 보고 랑도 새 아내를 들이는 이야기다.
<나뭇잎 배>의 미엔은 죽은 군인 동료들을 찾아서 묻어주고 혼을 달래주려고 숲에 머문다. 그러면서 숲에서 죽은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보스턴에서 역사학과를 다니다가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목숨을 잃은 미군이 말하길 베트남 민족은 힘든 역사를 살아왔는데 봉건 시대에는 남진하는 천 리 길을 열어야 했고, 전쟁 시기에는 호찌민 루트를 열어야 했고, 평화가 찾아오니 민족이 행복에 도달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미군에 대한 반감을 갖던 미엔은 그 말을 듣고 전쟁에 참전해서 죽은 사람들은 적과 아군 가릴 것 없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신비한 숲에는 많은 전사자들의 영혼이 여전히 머물고 있다.
<불타는 바위>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각기 다른 결과와 대우를 받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때 나와 그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싸웠던 사실을 모른다. 그때는 서로 적이었고, 지금 그는 인정받지 못하는 퇴역 병사로서 시클로를 몰고 있고, 상대는 사회의 우대와 보살핌을 받는 상이군인이 되었다. 그는 시클로를 힘겹게 몰고 있었고, 그 상대는 유명한 화가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의 목소리는 자부심과 슬픔이 섞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272)
단편집에 수록된 순서가 시간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뒤로 갈수록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대체로 단순한 구조에 단면적인 이야기들인데, <나뭇잎 배>와 <불타는 바위>는 전쟁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의 모습도 보여주면서 전쟁 자체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보여주며 전쟁 이후의 삶의 모습들에서 더 씁쓸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당대의 베트남 사회를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을 테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읽을 때는 분명히 불편한 부분이 있다. 여성 화자를 사용하면서 전쟁의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주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여성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가부장적 세계의 남성 작가가 가진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번역 또한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베트남 자연과 풍습에 대한 묘사가 생생해서, 그동안 모르거나 편견을 갖고 있던 부분을 채우거나 바로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숲과 강의 이미지는 베트남의 생명력이 그곳에서부터 비롯된 것처럼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