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가득한 문장들을 읽는 환희
인간이 주어진 운명을 연기하는 존재라면 어떨까. 그 연기를 얼마나 충실히 해내느냐에 따라서 삶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갑작스러운 상실에 따른 공허함이 찾아온다면 그 공허마저도 연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은 그런 질문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인공 앨릭스 클리브는 연극배우로 일하다 치명적인 실수로 은퇴해서 부인과 단둘이 조용히 살고 있다. 그는 다락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무언가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데, 회상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이 허구의 장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앨릭스의 기억조차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전제한 상태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억을 만들어내 꾸미고 윤색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는 쪽이다. ‘기억 여사’께서는 은근한 속임수에 대단히 능하니까.”(14)
그러니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화자, 앨릭스의 기억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미리 말해주고 난 후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앨릭스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다. 대담하게도 그의 첫사랑의 상대가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다섯 살 유부녀의 성애에 대한 이야기에는 쉽게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이제 앨릭스의 기억이 일방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기억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할 뿐이다.
그런데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독자를 매혹하는 것은 그런 소재적인 측면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게 된 사춘기 소년의 심리와 욕망에 대해 이토록 세밀하고도 촘촘하게 말해주는 소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앨릭스의 모든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 스치듯 느껴봤을 어떤 감정들에 대해 빠짐없이 말해주고 있다. 그 기억의 트랙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속임수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모두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런데 앨릭스의 현재는 어디에 있을까. 앨릭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게 되는데, 앨릭스가 어떤 측면으로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그와 그의 아내인 리디아와의 관계를 “봉인된 신념의 밀랍을 녹이는 데는 하나뿐인 자식을 잃는 일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삶도 흔들어놓았다. 스스로 자기 삶이 흔들린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갑작스러운 영화 출연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만나게 된 상대 여배우가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을 보고 나서, 돌연 그녀를 딸이 죽은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맡은 배역과 딸의 관계, 상대 배우의 삶, 우연히 만난 페드리고 소란이라는 인물, 자신의 탐정 노릇을 해주는 빌리 스트라이커 등을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고 복잡하게 직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에 수렴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 사이의 간극은 상상보다 매우 커서, 그 공백을 메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앨릭스 혹은 작가는 그 사이를 조금씩 좁혀가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넓혀가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초반에 앨릭스가 보여주는 다른 인물들과 마지막에 보여주는 인물들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에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가 보여주는 “오래된 빛”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언제나 과거에 속해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영원히 현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나의 모든 죽은 자는 어차피 나에게 다 살아 있고 나에게 과거란 영원히 빛나는 현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다 살아 있지만 사라졌다. 이렇게 말들로 이루어진 연약한 내세에만 남아 있을 뿐.”(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