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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아주 오래 조용히 곱씹어봐야 할 이야기들

by 초콜릿책방지기

이 소설은 아주 예민한 문제로 시작한다. 쉰두 살의 대학교수가 스무 살의 여학생을 성추행한 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나는데, 더 큰 문제는 이놈의 대학교수가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유죄라는 것에 동의해서 형식적 절차로 벌을 받는 것은 인정하지만 심리적인 것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는 태도이다. 그런 화자라서 독자가 화자에게 동의하기도, 몰입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로 읽게 되는데, 그렇게 설정된 일정한 거리감이 이 소설을 제대로 읽는데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화자인 데이비드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난 후, 동물보호소와 작은 농장을 일구며 살고 있던 딸 루시를 찾아간다. 그곳은 데이비드가 있던 도시와는 다른 시스템과 규칙, 언어가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는 데이비드가 그리 쓸모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루시와 함께 살기 위해 이웃인 페트루드를 돕기도 하고 동물진료소에서 일하는 베브 쇼를 돕기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의 집에 세 명의 괴한이 침입해서 루시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데이비드는 큰 충격을 받고 경찰에 신고해서 범인들을 잡고 싶어 하지만 루시는 사건 자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루시와 가깝게 지내던 페트루드와 베브 쇼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시는 처음부터 데이비드에게 자신이 아버지와는 다른 기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줬다. 데이비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것들이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현실의 유일한 삶을 동물과 공유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말해주지만, 워즈워드와 바이런의 언어로 생각하는 데이비드에게 루시의 말은 가닿지 않는다. 문명화된 백인 세계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데이비드와 땅과 가까운 곳에서 흑인들과 함께 하는 남아프리카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루시의 언어는 계속 어긋난다. 강간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 어긋남을 하나로 만나게 해 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데이비드에게 향한 루시의 반응은 역시나 예상 밖의 것이다.


아마도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면 공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개인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루시의 말을 데이비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데이비드는 강간범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 그곳을 떠나라고 하지만 루시는 도리어 데이비드를 제삼자 취급하며 절망하게 만든다. 루시는 증오 그 자체였던 강간이, 여성을 향해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내재된 폭력성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데이비드를 당혹하게 만든다. 그것은 데이비드가 중요하게 여겼던 자기 본질과 남성적 욕망을 정확히 겨누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바이런 시대의 낭만성이라는 것이 현대의 낭만성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데이비드는 루시와 함께 있으면서 교수에서 도그맨으로의 신분의 전복이 일어나는 한편, 남성적 욕망이 중요한 본질 중 하나라고 믿었던 가치뿐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쌓아오던 서구세계의 지적 배경까지 무너지게 된다.


데이비드가 대학에 계속 있었다면 전혀 알 기회가 없었던 페트루스나 베브 쇼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동안 그들에게 갖고 있던 편견 또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옛날 같으면” 그냥 이웃이 아니었을 흑인 페트루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하고, 이전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베브 쇼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데이비드 삶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임은 틀림없다. 그 경험 이후에 데이비드는 “강간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짓을 했던 스무 살의 여학생의 가족을 찾아가서 사죄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남는 문제는, 기약 없이 치욕스러운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충분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 충분한 것인지, 가해자에게도 역시 충분한 것인지. 그것이 과연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치욕이 데이비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루시가 임신을 했고 강간범의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데이비드에게는 그 아이가 백인인 그들에게 남기는 아프리카의 영역 표시처럼 느껴지는데, 루시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서 소작인이 되겠다고 하는 루시를 독자조차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화자와 설정된 거리감 덕분에 우리는 데이비드와 루시를 좀 더 떨어져서 살펴볼 수 있다. 문명화된 백인 지식인 데이비드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루시를, 페트루스나 베브 쇼의 관점에서 본다면,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시작해야만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조금은 수월해질 것이다.


사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선택지를 쥐고 있는 백인 이주민의 입장에서는 루시와 같은 선택은 무모하게 느껴질 텐데, 따지고 보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땅의 진정한 주인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루시는 아버지 데이비드와는 달리, 새로운 방식으로 그 땅에 정착해서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소작인의 처지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그 땅의 주인임이 틀림없다.


베브 쇼와 일하면서 동물을 사랑하는 동시에 죽여야 하는 그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느새 받아들이게 된 데이비드는, 이제 그 말뜻을 이해한다. “항상 더 어려워져요.” 자신의 성추행과 딸의 강간, 백인들의 영역과 흑인들의 영역의 문제, 남자와 여자의 문제, 바이런과 테레사의 문제 등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더 어려운 문제가 나타날 수도 있고, 사람은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쩌면 그저 단념해야만 풀리는 문제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치욕의 문제도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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