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사고의 틀을 확장해 주는 책
당대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바타유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당혹스러움이 앞설 것이다. 시대적 맥락에서 읽어낸다면 좀 더 쉽게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소설 자체로만 보면 외설과 문학의 경계를 논하기도 난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도 다른 방식으로 썼다면 좀 더 보편적으로 읽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것은 분명히 바타유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2025년 한국에서 이 책이 번역되어 나왔고, 다시 독자를 찾는다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한참 동안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책을 받아들일 만큼 철학적 배경이 확보된 것일지, 어차피 읽히지 않을 것이라서 다양성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바타유가 활동하던 당시 분위기와 배경을 조금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책을 참고해 보면, 1920년대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로 앙드레 브르통과 바타유를 꼽을 수 있는데, 1929년에 둘은 분열되어서 브르통은 주류파로 바타유는 비주류파로 나뉘게 된다. 브르통이 현실과 무의식 사이의 승화에 초점을 맞춰서 에로스를 바라봤다면, 바타유는 탈승화의 방향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바타유는 브르통이 겉으로는 성적 욕망의 해방을 외치지만 성적 욕망을 상징물로 대체하는 승화 작업에 전념한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에로스에 죽음 충동까지 받아들여 체계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바타유가 보기에 성행위는 순간적으로 죽음의 연속성을 경험하는 것이라서, 삶의 불연속성을 죽음의 체험으로 강화해서 연속성을 만들어 모든 것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 모든 장벽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성행위는 남아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라서 인간의 성행위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바타유의 이론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어지는데, 강력한 남성성 혹은 아버지상을 만들어내던 파시즘에 대한 도전이라는 시도는 근친상간의 이미지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아버지의 독점권을 부정하면서 권위를 파괴하고 성 차이와 세대 간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가 이상화하고 있는 남성적 우상화의 대척점에 성과 죽음이 가진 여성적인 힘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위와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바타유의 소설을 읽어 보면, 제사에 쓰인 헤겔의 인용문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며, 죽음을 끊임없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더없이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27) 바타유가 보기에 그 “강력한 힘”이야말로 성행위의 순간이라서, 「마담 에드와르다」에서 보여주는 묘사가 정확히 그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녀의 목덜미를 손으로 받치면서, 나는 허옇게 뒤집힌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 그녀는 나를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불가능의 영역에서 되돌아오고 있음을 알았고, 그녀 존재의 아래쪽 깊은 곳에서 현기증 나는 부동성을 보았다. … 벌거벗은 몸, 살을 벌리는 손가락, 나의 고뇌, 입술에 묻은 점액의 추억 등 모든 것이 그 꿈결 같은 시선 속에 묶여 있었다. 그 가운데 죽음으로 들어가는 맹목적 미끄러짐을 자극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60)
「나의 어머니」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그녀가 내게 열어젖힌 것은 죽음의 냄새가 깃든 광기 어린 웃음의 신전이었다.”(126) 라든가, “즉 내가 죽음을 선호한다는 사실, 내가 죽음의 소유물이라는 사실, 가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섹스의 욕망에 가슴을 열면서 내가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128)와 같은 문장들을 보면 그렇다. 근친상간에 대한 은유로 쓴 「나의 어머니」는 앞서 말한 대로 차이를 무너뜨리는 것, 죽음과 여성성에 대한 극한의 추구와 함께 인간만이 가진 금기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시체」는 바타유가 쓴 <서문으로 예정되었던 원고>에 해석이 들어있다. “내가 보기에 죽음이나 미칠 듯한 쾌감이나 나아가 숭고한 아름다움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무엇인가, 열락이나 쾌감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는 무엇인가와 뒤섞이고, 공포와 아름다움과 숭고함과 천박함은 서로 일치하면서 서로를 강화하며, 죽음과 쾌감과 아름다움은 결코 흐느낌과 구별되지 않는 미소 속에서 서로를 만나거나 서로를 잃는다.”(270)
결국 바타유 소설의 목적은 자신의 철학적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대상, 즉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가지 액체들 혹은 육체 자체들이 섞이고 경계가 무너지는 걸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적 기준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금기로 바라보는 것,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인간을 통제하던 생산적 노동에 대한 자유라는 측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노동이 아닌 비생산적 소비를 통해서 고통스러운 문명화 과정에 있는 인간들이 잠시라도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타유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자체가 보여주는 작품성과 그 소설의 존재가 말해주는 의미의 확장성이라는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작품 외적인 해석과 철학에 기대지 않으면 작품 내에서 충분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2025년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바타유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 욕망의 해방과 탈승화를 넘어 우리가 가닿을지도 모를 곳은 이제 기계와의 결합 혹은 육체와 분리되어 순전히 뇌가 인지하는 욕망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시대에 와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