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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 수어사이드>

자살한 사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질문

by 초콜릿책방지기

자살이라는 사건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고통뿐 아니라 수많은 질문을 남긴다. 어떤 단서와 정황이든 자살의 이유를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들여다보는 동안 해소되지 못하는 질문은 끝없이 이어지고, 대략적인 결론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중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그리고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도왔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 소설은 그런 질문을 품은 화자들이 말해주는 이야기다. 모든 자살이 주변인들에게 충격적이지만 여기 나오는 자살은 다섯 자매 모두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게다가 첫 자살이 가장 어린 자매인 서실리아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도 있다. 손목을 그은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고 난 후 다시 한번 집의 이층에서 날카로운 울타리로 몸을 던져 기어코 자살을 해내고야 마는 열세 살 소녀의 행동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남겨진 사람들에게 충격과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독자인 우리는 자살한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철저하게 외부자의 시선에 기댈 수밖에 없다. “우리”라고 묶인 복수의 화자들은 리즈번 자매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던 남학생들인데, 그들이 리즈번 자매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 때문에 자살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들이 목격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자매들이 자살한 이유를 찾기 위해 증거를 모으고 인터뷰를 시도한다. 하지만 증거가 보여주는 것과, 리즈번 부부의 인터뷰는 자매들이 자살한 이유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자살 당사자들이 알려주지 않았는데 주변인들이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신문 기자의 어설픈 추측과 이웃들의 짐작과 정신과 의사의 진단은 꽤나 단정적이라서 자매들이 살았던 동네에 있었다면 그런 주장들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이 피상적인 것들이고 겉으로 보이는 것들로부터 상상해 낸 것에 가까웠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을 잊지 못하던 화자들이 제대로 된 이유 혹은 진실을 찾기 위해 자매들이 있던 자리도 되돌아가 본 것이다.


그들은 자매들이 살았던 집과 무덤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찾아가기도 하지만 그 시절 그때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자매들이 살았던 시간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들이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끝없이 그 의미가 새로 생성되고 발견되는데, 인간의 삶과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자매들이 자살했을 때 화자들도 그들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그때는 제대로 생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부모들의 나이와 비슷하게 되었을 무렵에야 당시 살던 동네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제야 자매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애들이 달리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었겠는가? 부모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었다. 그들은 집 안에서는 죄수였고, 밖에서는 문둥병 환자였다. 그리하여 리즈번 자매들은 누군가-우리-가 그들을 구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세상으로부터 숨어 버렸던 것이다.”(258)


여기에서 화자들의 은밀한 죄책감을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을 구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 또한 어쩌겠는가. 그들도 자매들처럼 부모의 그늘 아래 있던 아이들이었는데. 산업은 몰락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쇠락한 동네에서 살던 아이들일 뿐이었는데.


“결국 리즈번 자매들을 갈가리 찢어 놓은 수많은 고통은 그들이 오랜 고민 끝에, 오점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어른들이 물려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암시했다.”(317)


지리멸렬한 삶을 선택하는 용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자매들의 결정에 대해서 화자들은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화자들이 선택한 삶, 대단한 것 하나 없는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단순한 이기심으로도 죽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살의 본질은 슬픔이나 수수께끼가 아닌 단순한 이기심이었다. 그 애들은 신에게 맡겨 두는 편이 더 나았을 결정을 자신들의 손으로 내렸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큰 힘을 갖고 있었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해 있었으며, 지나치게 몽상적이었고, 지나치게 맹목적이었다. 그들이 떠난 뒤에 남은 것은 모든 자연적인 죽음을 압도하는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사실들을 나열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목록이었다.”(321)


자매들이 자살한 이유가 억압적 가정환경일 수도 있고, 이웃들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고, 획일적이고 우울한 동네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화자들이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희망 없는 세상과 별것 없는 삶이다. 어쩌면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이유도 별다른 것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저 사는 것처럼 그냥 죽는 것.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보다 더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남겨진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의미가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이유마저도 퇴색되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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