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회복해야 할 근원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여기 한 문제적 인물이 있다. 문제적 인물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다.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들보다 더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태어난 어떤 개인이 사회의 어둡고 타락한 면을 좀 더 잘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문제적 인물인 영혜는 자신의 목소리로 느끼는 바를 말해주지 않는다. 영혜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남편이나, 일면만 보고 있는 형부나, 근본적인 한 가지를 이해하는 언니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통해서 영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전제였으므로- 그녀가 행하는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꿈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는 병자처럼 보일 정도로 말라가면서도 극단적으로 채식을 고집한다. 그런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회는 그녀를 망가진 물건 혹은 비정상 취급을 하는데, 영혜에게는 그 반응조차 가닿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아가서 마치 식물이 된 것처럼 옷을 벗고 햇볕을 쬔다.
이어진 연작 소설 「몽고반점」에서는 영혜가 어른들은 갖고 있지 않은 몽고반점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작가는 몽고반점에 대해서 진화 전, 태고의 것, 혹은 돌연변이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혜가 억눌린 야생성을 회복한 존재로서의 의미를 띠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영혜의 야생성은 아무나 알아볼 수는 없지만 예술가인 형부는 알아보게 되어서 영혜의 몸에 꽃그림을 그려 넣는다. 꽃그림은 영혜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면, 식물화에 대한 열망을 깨우쳐준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 생명성의 분출이 사회적 금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영혜가 원하는 나체의 상태라든가, 형부와의 성적인 결합과 같은 점들은 어쩌면 사회적 금기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원초적 생명에 가닿고 싶은 몸짓이었을 텐데,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해 줄 리가 없다.
폭력적이었던 부모와 그 억압에 익숙해 있던 언니도 영혜에게는 타락한 환경일 뿐이다. 그런 환경에 저항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인 항거 혹은 죽음이다. 영혜는 죽음 쪽에 가까워 보이는데, 단순한 죽음이라기보다는 식물화이기 때문에 인간적 입장에서는 죽음이지만 비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변형일 수 있다. 영혜의 변형은 사실 다시 태어남과 같은 것이고 분열되었던 존재의 통합에 가까운 것인데, 이 또한 바깥에서 보기엔 정신병자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적 인물인 영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영혜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채식주의자에서 화자인 남편이 말하는 것처럼 영혜는 "자신이 고르고 고른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단 한 가지 특징이 영혜라는 사람을 변별해 준다. 영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데, 이런 특징은 사회적 통념과 억압에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걸 암시한다. 그에 더해서 피와 폭력에 저항하려고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한순간에 변모하기도 한다. 영혜가 세상의 몰이해에 대항하는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자신을 향한 폭력적 억압에 대한 대응은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언제나 안으로 향한다. 이 모든 모습은 다분히 여성적 방식의 해결로 보이며 인간이 만들어놓은 현재의 인간 중심 질서에 대한 질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무감하고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관습과 질서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모든 생명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아주 평범한 문제적 인물인 영혜와 함께 지속되고 있다. 이제 그 인물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 죽으면 안 되는 이유를 우리는 말해줄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식물이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영혜가 식물이 된 것을 상상하다 보면 인류의 미래가 무해하고 푸르른 식물 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