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으로도 주변에 권하고 싶은 책
AI가 상용화되면 우리 삶에 일어나게 될 변화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는데, 일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 앞에서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여유로운 인간이라는 핑크빛 상상으로 덧칠해보곤 한다. 생산을 대신할 기계가 있다면 인간은 여유시간을 소비만 하면 되는 일이고, 그렇게 된다면 주어질 여가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까 혼자 고민하며 미소 짓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과도한 소비의 시대 또한 막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게 된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 인간은 정신적 여유도 생길 테니 정신적 생산 활동에 눈을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환경을 파괴하는 물질적인 것에는 조금 덜 신경 쓸 것만 같아서 그렇다.
물론 이런 상상은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경제적 정의를 이룩할 생각이 없는 사회에서 과잉 노동 시간에 따른 과잉 생산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러셀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목적 지향적 사회에 익숙해졌고, 극단적 양극화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꽤나 무기력해져 있다고 느낀다. 그런 무기력조차 우리에게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병리적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러셀이 말하는 것처럼 속 편하게 놀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29)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우리가 숭배하는 지식조차 무용과 유용을 따져서 어떤 확실한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는 지식은 무용하다고 취급하는 태도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지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 혹은 폭넓고 인간적인 인생관을 세우는 수단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전문적 기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1)
“의식적인 활동이 어떤 한 가지 목적으로만 모아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쇠약 증세를 동반하는 균형감의 결여를 보이게 마련이다.”(44)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45)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51)
대략 백 년 전에 이미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고 있는 러셀의 주장을 귀담아듣지 않은 결과는 지금 우리의 삶이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폭염에 시달리며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후 재앙 뉴스를 보면서, 여전히 노동과 일, 성공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병적 징후를 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의 효용성을 위해 여성이 좁은 집을 지키며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에 대해 지적하면서, 공동체 형태의 건축물을 제안하는 부분은 정말 흥미롭다. 지금도 협동조합 형태로 공동주택을 건설해서 함께 사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비율은 정말 미미하다. 개별화된 주거 공간은 각자도생의 가치를 강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효율성을 극대화한 아파트가 우리에겐 여전히 너무나도 강력한 욕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식인들이 냉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공감을 넘어 절망을 맛보게 된다. 문학 교육의 무용함이 그때보다 더 심화된 지금은 이미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어서다. 교육에 대한 러셀에 지적 중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획일적 교육 시스템에 대한 우려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새롭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지금 시대에 그런 우려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의 이야기로 보인다. 이후에 이어진 파시즘과 히틀러에 대한 비판 및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 등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러셀의 혜안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책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동시에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눈을 갖는 자극을 준다면 그것은 독자에게 책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양쪽 눈으로 균형 있게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조율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처럼 제목에 낚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꼭 읽고 나서 다른 사람도 낚아주길 바라게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