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안인>

지구를 위해 겹눈으로 바라보며 쓴 소설

by 초콜릿책방지기

이 소설의 제목은 독특하다. 복안인. 겹눈을 가진 인간이라는 뜻이다. 여러 개의 눈을 가진 인간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는 상상으로부터 나온 제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볼 것인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봐야만 하는 이유는 있을까. 제목에서부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이 소설은 막상 읽기 시작하면 작가가 만든 세계에 빠져들어 질문을 잊게 된다.


소설의 시작은 동굴. 이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산에 구멍을 내어 도로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짧게 보여준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와요와요 섬과 그 섬에 사는 둘째 아들 아트리에의 이야기다. 이어진 이야기에서는 자살을 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고 신변을 정리하는 앨리스를 보여준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복안인이 이들을 모두 한 번에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아트리에와 앨리스가 교차되다가 아미족인 하파이의 이야기가 추가되고, 아트리에를 사랑하는 우르슐라가 또 추가되고, 부눈족인 다허의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앨리스의 남편인 야콥센도 빼놓을 수는 없다. 거기에 볼트와 사라까지 추가가 되면, 이 소설은 작정하고 지구상의 다양한 인종을 하나로 엮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대만의 인종 구성은 아미족과 부눈족과 같은 원주민에서 일본인과 한족이 추가가 되고 이제는 관광객까지 넣어야 한다는 앨리스의 말처럼 상당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어쩌면 소설 속 다양한 인종들은 대만 자체의 상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대만은 지구상 인종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섬나라인 대만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야콥센이 태어난 덴마크와는 다르게 산도 많이 있다. 자연 자체로 봐도 땅과 바다로 이루어진 지구의 축소판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보면 대만을 중심에 두고 지구를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엄청난 야심을 엿볼 수 있는데, 소설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시의적절하고 묵직한 주제 덕분에 무리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국 오염된 지구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 대만을 중심에 두건 말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와요와요 섬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아트리에가 망망대해에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 쓰레기 섬을 만난 덕분이라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설정이다. 그 쓰레기 섬이 대만 해변을 덮쳐서 하파이는 ‘일곱째 시시드’라는 이름의 삶의 터전을 잃고, 앨리스는 집을 잃지만 아트리에는 목숨을 보존한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 혹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은 작가가 이렇게 말하듯, “말하자면, 인생은 사람의 그 어떤 생각도 용납지 않는다는 것. 사람은 주인이 일방적으로 메뉴를 결정해놓은 식당에 들어가는 것처럼 언제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133)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쓰레기가 섬이 되어 돌아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만 한다.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 문제뿐 아니라 작가는 리룽샹이라는 터널 기술자를 통해서 인간이 마음대로 구멍을 뚫고 헤집어놓는 산의 모습도 보여준다. 산이라는 대상을 보며 인간은 그것에 인간과 같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훌륭한 사냥꾼이었던 다허의 아버지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고래잡이였던 사라의 아버지 아문센을 통해서는 인간이 자연에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의 제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파괴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로운 지점을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그 모든 인물들을 하나로 조망하는 것 같은 복안인은 결국 작가일 텐데, 작가 혹은 복안인이 그 모든 걸 동시에 봐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복안인이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해주고 있다. 인간보다는 산을 더 사랑했던 야콥센이 죽어가는 순간, 복안인이 나타나서 야콥센과 앨리스의 아들이었던 토토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야콥센은 시신으로 발견되었지만 함께 산행을 나섰던 아들 토토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어리둥절한데, 토토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당혹스러워진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앨리스의 기억과 상상이 분리되면서 토토가 사라졌다는 대목에서 작가가 가진 소명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토토가 가진 상징적 의미는 기억과 상상이 분리되지 않고 다른 종의 기억까지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징인 글쓰기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글쓰기를 통한 보존과 복원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다른 생명이나 생존 환경을 기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어. 인간은 자신들이 다른 생명의 기억에 의지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374) 하고 비판하는 대목에서 보면, 작가의 의도는 여러 인종뿐 아니라 다른 종의 기억까지도 글쓰기를 통해 복원하거나 지키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려면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안인처럼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봐야 할 것 같다.


대만의 어느 해안가라는 현실에 발 딛고 있지만 환상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이 소설은 와요와요 섬이라는 설정이 자칫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고, 토토의 비밀은 무리수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으며, 다양한 인물의 등장이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특징들이 우르슐라의 아이가 고래 지느러미처럼 생긴 다리로 태어났다던가, 오하요라는 고양이가 앨리스에게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라던가 하는 것들에 수긍하게 되고, 이 소설의 제목이 ‘복안인’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 많은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이 소설의 주제는 환경운동가들의 그 어떤 구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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