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어떤 정신 질환자의 내면 상태

by 초콜릿책방지기

이 소설을 반만 읽은 상태라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전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매우 다른 감상을 갖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대개 어릴 적 읽었던 책을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고 나면 기억 속 느낌과는 사뭇 다른 책이 되어 돌아오는 것에 깜짝 놀라곤 할 텐데, 이 책은 그 강도가 아주 강한 쪽에 속하는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떠올려 봤던 라스콜니코프는 인간의 양심과 죄의식에 대해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어보니 기억 속에서 미화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오히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조시모프의 진단처럼 “히포콘드리아 환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고, 작가는 그런 병증의 가진 인물의 정신세계를 아주 실감 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주변 사람들 모두 라스콜니코프가 예민하고 우울하다고 말하고 있고, 그를 보살피던 친구 라주미힌도 이렇게 말한다. “무뚝뚝하고, 음울하고, 오만하고 자존심이 센 친구입니다. 최근에는(어쩌면 훨씬 전부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의심이 많아지고, 히포콘드리아 환자처럼 굴더군요. 관대하고 선량하기도 합니다.”(471)


당시에 대학생이라는 신분이었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동생이 그를 위해 조력을 다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제법 똑똑했던 것 같은데, 과외 일자리도 끊어져서 휴학까지 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 때문인지, 페테르부르크의 숨 막히는 무더위와 답답한 공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좁은 방에 혼자 칩거하면서 그만 정신 질환이 생겨버린 것 같다. 라스콜니코프의 엄마인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자신의 두 아이들에 대해 “둘 다 우울증 환자 같고, 둘 다 기분을 맞추기가 어렵고, 성질도 불같고, 둘 다 도도하면서도, 둘 다 관대하고.”라고 말하는 걸 보면 어쩌면 타고난 기질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하숙비도 밀려 있는 데다 며칠째 굶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수 없이 전당포에서 시계를 맡기면서 느끼게 되는 분노와 억울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계를 맡기고 받은 푼돈을 가지고 충동적으로 선술집에 들어간 라스콜니코프는 그곳에서 마르멜라도프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딸인 소냐가 몸을 팔아서 가족을 먹여 살리게 만들 만큼 구제 불능의 알코올 중독자인 마르멜라도프에게 전당포에서 받은 돈을 주는 것을 보면,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가난뿐 아니라 주변의 가난도 인지할 만큼 인정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을 위해 희생적인 결혼을 선택하려는 동생 두냐의 결심에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한다.


라주미힌이 제안한 번역 아르바이트 일을 받아오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해결책이었을 텐데,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쪽을 택한다. 언젠가 선술집에서 들었던 대학생의 궤변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노파를 죽이고 돈을 다 빼앗아라, 그리고 그걸로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라.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하나의 아주 작은 죄가 수천 가지의 선행으로 무마되지 않을까? 하나의 목숨으로 수천의 목숨을 부패와 파괴에서 구해 내는 거야. 한 사람의 죽음을 수백 명의 생명과 맞바꾸는 거지.”(150)


라스콜니코프가 사로잡힌 괴상한 이론은, 나폴레옹 같은 주권자는 대학살을 하더라도 허용해 주고, 자신과 같은 소시민은 비열한 전당포 노파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서 대의를 위한 일과 정의로운 일이라는 가치에 대해 혼동이 와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19세기에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어떤 한 지식인의 심리상태를 면밀하게 알게 된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라스콜니코프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묘사는 독자조차도 착란 상태에 들어가게 만들 것만 같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의 심리상태에 대해 사실적이고도 치밀하게 쓴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스도옙스키가 지금 활동하는 작가라도 한다면, 현대인의 불안과 강박, 우울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그려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라스콜니코프를 보여주는 문장


“사람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도덕적 감정을 억누르고 자유도, 평화도, 심지어 양심까지도, 아니, 그 이상의 것까지도 고물 시장에 내다 놓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엉망진창으로 멸망해도 된다는 거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게만 된다면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고유의 궤변을 고안해 내고, 예수회 교도들에게 배운 대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정말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달래며 스스로를 설득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생겨 먹은 존재들이다 모든 게 명약관화하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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