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락의 아내>

평범한 악의 내면 세계

by 초콜릿책방지기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이 악한 쪽일 경우에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보통 평범하거나 선한 인물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행복을 찾거나 좌절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의 공식이고, 그런 이야기 안에서는 안전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선함과 도덕성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으니 충돌하는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의 선택이나 환경, 운명 같은 것을 탓하면서 인물에게 기꺼이 마음을 주면 된다.


하지만 도저히 마음을 줄 수 없는, 천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주인공의 몰락과 파멸을 응원하게 되는데, 이럴 때는 화자의 역할에 따라서 독자의 감정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선한 화자가 따로 존재하는 경우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문제적 인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전지적 작가인 화자가 안톤 시거를 보여주고 있어서 악인의 내면은 알 수 없으니, 독자도 관찰자이자 심판자로서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문제적 인물이 화자라서 그의 내면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읽어내야 한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고 절대로 좋아할 수 없더라도 그가 들려주는 대로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이 이 소설이 가진 긴장감이다. 분명히 나쁜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해서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 바깥의 몫이라서, 주인공인 톨락에게는 내면의 갈등이 없지만 오히려 독자에게는 갈등이 생긴다. 이 인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그를 미워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조금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지는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대대로 운영해 온 목재소를 물려받은 톨락은 한때 “산골짜기의 신비로운 남자”로 불리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변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꽉 막히고 매우 가부장적인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잉에보르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 좋은 사람이었지만 톨락과 사느라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그들의 자식인 힐레비와 얀 비다르도 톨락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얻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에 더해, 톨락은 결혼 전 같은 마을의 오세를 성폭행해서 낳은 아들인 오토를 가족들에게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집으로 데리고 온다. 오토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오도라고 말하는 장애아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톨락 때문에 가족들은 힘들어하지만 정작 톨락 자신은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 선조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정신적 문제(분노조절장애처럼 보인다)를 해결하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해서 상황은 더 나빠질 뿐이다. 스스로가 고립을 자처하긴 했지만 고립 속에서 더 나빠지기만 하던 톨락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완전한 고립에 빠지게 되고,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던 오도만 옆에 남아있게 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톨락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그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를 유일하게 사랑해 준 사람인 잉에보르그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그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데, 뒤로 갈수록 이마저도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그는 그저 자신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오도랑 거의 비슷한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래서 시종일관 화자인 톨락의 말을 따라가던 독자는 그의 내면을 다 읽고 나니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게 되어서, 화자의 내면에 가까이 붙어 있던 독서가 끝나고 나면 불편한 긴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재미와 완성도를 떠나서, 악인의 내면을 읽고 나면 우리가 이런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가까이서 보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가 가해자의 내면을 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악의 평범성’을 지속적으로 의식하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있으면 세상이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톨락과 같은 인물처럼 ‘악의 평범성’은 제대로 된 생각, 즉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면 생기게 된다.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앱스타인 파일을 보면서 인간의 일부는 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는데,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거나 인간 내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한 언제든 그들이 영향력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은 단순한 문장으로 소설적 긴장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긴장을 모두 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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