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줘 아니면 나를 죽여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통한 예술의 의미 발견

by 초콜릿책방지기

이십 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의 면면은 다양했는데, 당시에는 각자가 품고 있는 개성의 차이가 그리 거슬릴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취향과 삶의 지향점 같은 것들이 전부 달랐을 텐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그저 조금씩 다른 차이라고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게 어울리던 친구들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만나게 되면, 뾰족하고 고집 세고 타인에 대한 관용이 적어진 모습이 되어 있곤 해서 놀라게 된다. 아마 그런 놀라움은 그들도 나에 대해 똑같이 느끼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어 있는 친구들은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성실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자기 일에 성취를 이루기 위해 그 길만 보고 달려왔을 것이라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나 문화적 취향을 함양할 시간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사회의 착실한 일원이 되기 위해, 가족과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폴 가셰도 우리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왔고 그 또한 한 사회의 선량한 구성원이다.


일상을 사느라 다른 것들에 무심했던 주인공은 가족들과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피렌체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크림 초콜릿’을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던 주인공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행위예술가의 전시회 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마리나의 다양한 퍼포먼스는 주인공의 내면을 강타하게 되는데, 그 충격은 일상으로 복귀한 후에도 계속 남아서 오래도록 마리나의 예술 세계를 곱씹어보게 된다. 마리나의 예술은 그동안 주인공이 생각하던 예술과 많이 달랐는데, 그저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격하고 선정적으로 보이는 마리나의 퍼포먼스는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 개개인이 기능적이고 효용적이기만 한 존재에서 벗어나서 서로를 바라보기를 촉구하고 있다. 타인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생각을 확장하면, 인종학살이나 인권 탄압, 전쟁과 같은 세계적 문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런 확장은 일상에 매몰되어 있던 개인들에게 새로운 가치에 대한 각성 혹은 생각의 전환일 수 있으므로 예술이 가져다주는 궁극적 의미들과 맞닿아 있다.


마리나가 가져다준 충격과 각성은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주인공에게 삶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여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하는 코로나 시대와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으로 인해 일에서 떨어지게 된 시간 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관과 삶의 태도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이 옳으며 내 권리 또한 마땅하다고 믿으며 살아온 나는 삶의 의미나 가족을 넘어선 이웃의 운명이라는 그토록 흥미로운 주제에 관해 단 한 번도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131)


그의 삶에 찾아온 예술의 의미는 그동안 믿고 있던 생각을 전복하는 것인데, 나이가 들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은 매우 드물게 찾아오는 것이라서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처럼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연함보다는 완고함에 더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예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직업들을 하나로 묶으며, 트럭 운전사나 건축가, 혹은 보험업자처럼 눈에 명확하게 보이는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예술은 무가치하고 근거도 개연성도 없는 영역이라고 믿었다. 나에게 예술이란 제약과 의무의 반이어였다. 그렇게 믿었다. 헛된 것은 자신이면서, 예술이 헛되다고.”(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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