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슬로 작가의 탁월한 유머 감각
라슬로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으며 받았던 인상은 필멸하는 존재들을 향해 사는 동안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묵시록적인 세계 혹은 죽음의 세계를 오히려 더 가깝게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어둠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것, 밝음의 이면을 기꺼이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삶을 완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걸 실감하게 하는데, 덕분에 소설들의 분위기는 어둡고 장중해서, 이 작가는 유머라고는 도통 알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인상이 남겨준 편향된 편견이 어쩔 수 없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소설 또한 그런 이미지 바깥으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나, 작가는 독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뛰어넘어서, 어딘가 저 먼 위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 피식거리게 하거나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드는, 여러 편의 콩트를 보는 것과 같은 단편들을 만들어서 이 한 권의 책에 넉넉하게 담고 있다.
이제 누군가 라슬로의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단연코 이 소설을 우선순위에 두고 말하면서 동시에, 웃음 뒤에 남은 슬픔과 필멸자들의 고독과, 알지 못하지만 끝없이 찾아 헤매야만 하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여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웃어야 하는 대목에서는 절대로 놓치지 말고 기꺼이 호탕하게 웃어 젖히라는 말도 잊지 않을 것은, 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가의 유머 감각은 다른 소설에서 맛보지 못한 매우 소중한 덕목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일 리토르노 인 페루자」에서 마에스트로의 제자들이 피렌체를 떠나 페루자를 향해 마차를 타고 가는 여정에서, 흔들리는 마차에 실려 가며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어서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그들이 하는 말들이 가관인데, “팔다리 하나 움직일 수 없이 향내 나는 풀숲에 시체처럼 누워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를 늘어놓은즉, 지금부터 도보로 걸어가자느니, 각자 새의 등에 앉아서 날아가자느니, 더는 가지 말고 여기 도로변 풀숲에 있다가 그냥 다 같이 죽자느니 하고 이야기했으나, 이에 마부가 그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는데, 제발 그만 좀 하슈,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금방 도착할 거요,”(382) 라고 말하는 식인데, 고귀한 예술품을 만들어 온 이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말은 그 예술품에게서 갖게 되는 경이로움과 상당한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모습들은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와 연결된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은 그저 스스로 존재할 뿐이고, 그것의 온전한 의미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오히려 의미를 알지 못해서 예술은 더욱 경이로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이 원본이냐 복제품이냐의 여부는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정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예술품과 관람자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의미는 둘이 만나는 그 순간, 그때까지의 시간이 더 중요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예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데, 무엇이 과연 예술인가, 좋은 예술을 알아보는 심미안이 따로 존재하는가, 원본의 아우라가 예술의 의미를 좌우하는가, 우리는 과연 예술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있기는 한 것인가 등등을 각각의 단편들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대체로 모든 단편들이 인상적이고 재밌는데, 처음 수록된 「가모가와의 사냥꾼」부터가 가모가와 강에서 물고기 사냥을 하는 백로에게서 찾은 “무목적성의 아름다움”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고, 우리가 여전히 잘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알람브라(「아득한 명령」), 아크로폴리스를 보러 가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곳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서」, 영매에 불과하다는 명인이 보여주는 일과 삶이 일치된 삶-명품 립스틱을 바르는 아내가 옆에서 돈을 세는 것까지도-(「이노우에 가즈유키 명인의 삶과 일」), 독특한 색깔 하나만으로 예술성을 완성한다는 설정(「일 리토르노 인 페루자」), 어쩐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땅을 파서 거기 숨겨져 있던 달리는 말을 조각으로 캐낸다는 이야기(「무언가 밖에서 불타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가 프락시텔레스의 아프로디테 조각상을 모방한 수많은 아류작 중 하나지만 현대에 얻고 있는 예술적 명성(「당신이 바라보고 있을 곳」), 바로크 음악 이후로는 퇴보와 타락일 뿐이라는 주장을 웃음을 참기 힘들게 말하고 있는 건축가(「사적인 열정」), 20년마다 신사의 옛 건물을 다시 짓지만 새 건물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곳에 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전통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서양인과 일본인의 모습(「이세신궁 식년천궁」), 노를 예술의 장르로 만든 사람의 이야기(「제아미는 떠난다」) 등이 기억게 남는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집 자체만도 659쪽에 달아는 분량일 뿐 아니라, 작가가 사용하는 만연체는 중독성이 있어서, 이 소설집을 읽고 나면 문장이 점점 더 길어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연체는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보게 되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과 결합하여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분절이 없는 시간에 대해 의식하게 만든다.
이 소설집의 구성은 완결된 구조인데, 그저 생명 활동을 하는 존재의 아름다움(「가모가와의 사냥꾼」)에서 시작해서,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수많은 시간과 일상을 살아내던 성실한 존재들의 이야기들을 통과한 후, 그 모든 존재들이 결국 맞아들이게 되는 운명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무덤 속에서 사라져 간 ‘상 왕조’의 사람들과 같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매우 당연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