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라스콜니코프가 될지도 몰라
올해는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기능하게 되는 큰 전환의 시기라고 들었다. 인간이 하던 일을 모두 대체하고 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다양한 예측이 나오고는 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뉴스와 함께 뉴테크와 관련된 회사들이 쌓아가고 있는 어마어마한 부에 대한 정보를 알고 나면, 인간의 가치는 과연 이전 시대와 동일한지, 모든 인간이 정말 평등하다는 가치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천조가 넘는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일론 머스크와 천 원 한 장도 고민하며 쓰는 나는 과연 똑같은 권리와 가치를 지닌 인간이 맞는지, 그와 나의 목숨값이 과연 똑같다고 할 수 있을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지식과 부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복잡한 생각이 스쳐 간다.
어떤 인간은 ‘이’에 비유하고, 어떤 인간은 그 ‘이’와 같은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남을 옳은 목적을 위해 인간을 학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이 대학생 지식인은 그 믿음에 기반해서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동생을 살해한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죽이고 그 돈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올바른 목적을 위한 악행이므로 정당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의 범죄는 CCTV도 과학수사대도 없던 시절이라서, 완전범죄가 될 수도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대신 자수하러 온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범죄자로 지목하고 있는 포르피리를 비롯해서 주변 인물들이 그를 의심하는 이유는 라스콜니코프의 행동이 미심쩍기 때문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나폴레옹만큼 배포가 크지는 못하고 심약해서, 범행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신기하게도 자의식이 비대한 이 지식인은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그가 가진 믿음에 기반해서 보면, 귀족과 대학생과 농민과 전당포 노파의 목숨의 가치는 모두 다른 셈이다. 여전히 귀족 계급이 남아있던 19세기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일론 머스크와 비교해 보는 현대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듯해서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믿던 시절이 인간에게 조금 더 낙원에 가까운 세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소냐가 자신뿐 아니라 라스콜니코프까지도 구원할 수 있었던 힘은 종교적 힘이었을 텐데, 그건 단순한 죄사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가치와 존엄을 갖는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 앞에서 새롭게 인간의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기다. 인공지능이 신처럼 기능하는 시대에 인간은 과연 그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런 가치를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자칫하면 우리도 라스콜니코프처럼 거대한 자의식과 불필요한 정보와 편향된 믿음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살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이버 폭력과 살해는 난무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이런 세계에서 라스콜니코프보다 나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냐는 어디에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만 남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