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情城市>

알차게 구성된 각본집

by 초콜릿책방지기

희곡이나 각본집을 읽을 때는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와는 다른 상상력이 작동한다. 묘사된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 마치 감독이 된 것처럼 그 장면을 만들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 감독의 일과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완성된 화면을 상상해 볼 테고, 잠깐이라도 인물의 캐스팅과 연기까지도 제멋대로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 이 책의 표지에서 양조위가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지 않았더라면, 린원칭이라는 인물도 다른 배우로 캐스팅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추천사와 서문, 주톈원의 13문 13 답에 이어서 영화의 시나리오와 각본집이 실려있다.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시나리오와 각본집을 먼저 읽는 편이 낫다. 어떤 영화인지 알아야 영화에 대한 뒷이야기를 이해할 애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와 각본집을 한 번에 읽고 나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두 가지 방식의 글이 보여주는 차이에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장면과 인물들이 머릿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상태에서 앞부분에 수록된 영화 주변의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이 영화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애정이 동시에 생겨나는 걸 느낄 수 있다.


아마 영화를 미리 본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 정도의 애정이 전제되어 있는 상태로 읽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는 여기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이미지가 이미 분명하고 또렷하게 떠오를 것이다.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게 된 사람은 알아서 상상하게 되는 인물들의 이미지와 함께 서사에 좀 더 집중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각본집의 매력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이 영화는 린씨 가문의 네 아들이 격변하던 대만 역사에 휘말려서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되는 이야기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45년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이 대목부터 이미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다는 생각에서 심리적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 또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겪어서인지 이 각본집을 읽고 나면 어쩐지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경우, 주톈원의 언급처럼 양쪽 진영의 공격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역사물에게 그런 비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긴 한데, 당대를 살아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비판 또한 어떤 쪽이든 매우 이념적이고 개념적인 문제일 뿐이다. 영화는 오히려 그저 실제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허우샤오셴 감독의 말이 와닿는다. “저는 자연의 섭리하에서의 사람들의 삶을 찍을 수 있길 바랍니다.”(97)


그래서인지 아직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가 매우 담담하게 그 시대를 그리고 있다는 평이 많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영화의 제목에 촉촉한 감정을 가장 많이 담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도 이 각본집은 우리와 비슷한 현대사를 경험한 대만을 아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읽고 생각하고 상상하기에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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