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소설의 색다른 재미를 발견하는 시간
이 소설의 제목 아래에는 “줄 위의 남자”라는 부제가 있다. 원제는 그저 “틸”일뿐이지만 우리나라에 번역된 소설집에는 친절하게 부제가 붙어있는 것이다. 부제 때문인지 소설의 내용이 줄광대의 이야기 거나 줄타기 곡예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다는 예상을 하며 읽었다. ‘신발’이라는 첫 장이 줄타기 장면으로 시작하니까 여지없이 그런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공중의 제왕’이라는 장에서는 엉뚱하게도 틸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지식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치고 싶은 클라우스 울렌슈피겔은 방앗간 주인으로 살다가 마녀사냥을 위해 돌아다니던 테시먼드와 키르허 일당에게 잡혀서 처형당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더 이상 그 마을에 살 수 없었던 틸은 유랑 극단의 마차에 몸을 싣고 떠난다.
장터를 전전하는 유랑 족속은 가장 비천한 계급이다. 대체로 그들이 맞이할 마지막은 노상에서의 객사이며 그보다 나은 것이 거지 생활이다. 틸의 아버지인 클라우스도 방앗간 주인이라는 하층 계급이었지만 틸은 그보다 더 아래로 전락한 셈이다. 하지만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굶주림과 폐허, 죽음이 언제나 가까이에 있는 걸 본 틸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광대로 살면서 왕을 비롯한 권력층들 가까이에도 있어 봤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맹목적 믿음과 자신들이 가진 권력에 대한 복종이 그저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빠르게 간파한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터무니없는 마녀사냥으로 억울하게 죽어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도 아버지를 배반하는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틸에게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가치다.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한 열정 외에는 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를 만난 사람들이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틸에 대해 짐작할 뿐이다. 함께 도망친 넬레에게는 기댈만한 오빠였고, 당나귀 오리게네스에게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으며,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그의 아내 리즈에게는 거침없는 풍자와 유머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소설은 화자를 계속 바꾸고 시간을 뒤섞으며 30년 전쟁 동안 살아남은 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틸의 공연을 보게 된 마르타의 관점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틸의 아버지 클라우스에게로 갔다가, 틸을 황제에게로 데리고 가는 임무를 맡은 마르틴 폰 볼켄슈타인에게도 옮겨졌다가, 리즈의 관점으로 간다. 그러고 나서 프리드리히의 관점으로 가면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틸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넬레에게로 가면서 과거로 시간이 옮겨가기도 한다. 그리고 넬레의 남편이 되는 아담 올레아리우스에게로 갔다가 키르허 신부에게로 가서 틸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학자가 결국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갱도 안에 갇힌 상태에서는 틸이 화자가 되는데, 그는 그곳에서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30년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장인 ‘베스트팔렌’ 장에서는 리즈가 다시 화자가 되는데, 모든 권력을 잃고 추락한 리즈에게 틸이 건네는 충고는 이것이다. ‘평화로운 죽음보다 훨씬 좋은 것은 죽지 않는 것이라고.’
평생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그가 보여주는 외줄 타기 곡예는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당대의 아슬아슬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쟁에 더해 페스트까지 돌며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 있던 17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에서 프로테스탄트니, 가톨릭이니, 왕이니 선제후니 하는 문제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일 뿐이다. 틸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독히 운 나쁘게 태어난 시대일 뿐이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이 참혹한 전쟁이었다는 30년 전쟁 동안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묘기를 보여주는 틸의 삶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건 소설의 앞부분에 이미 말해두었다. 만약 그걸 잊고 있었다면 틸이라는 인물이 살아온 궤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서서히 깨닫게 된다.
“고개를 젖히고 있던 우리는 가벼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23)
덤으로, 작가가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서 모국어인 독일어에 대해 거침없이 풍자하는 걸 보면 틸이 작가의 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뼈 있는 유머를 날리는 틸의 모습과 상당히 겹쳐 보인다. 또 하나의 재미는 작품 속에 벌거벗은 임금님,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등등의 많은 이야기들을 양념처럼 넣어두어서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