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쓰기

한 사람의 하루를 쫓아가며 쓰는 이야기

by 우아써니


6단계 전기장판을 6에 맞추고 의례하듯이 두 시간 타이머를 맞추었다. 가볍게 커피 한 잔과 레몬 시폰케이크를 먹고 난 직후였다. 그러면 안 되는데, 따뜻한, 아니 뜨거운 곳을 찾아 침대로 기어든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이제 3시간이 남아있다. 침대에 누워 김애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오늘 끝내볼까 마음먹었다. 아직 <안녕이라 그랬어> 속 <안녕이라 그랬어>는 시작도 못했는데 주변에서 계속 그 책 어떤지를 물어오는 까닭에 뭐라 해줄 말이 없기도 했고, 지루하게 책 한 권을 오래 붙잡고 있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던 탓이었다.



베개를 세 개 쌓아 올리고 등을 기댔다. 오른쪽 자리의 하얀 리넨 베개 커버가 염색을 하고 수건을 깔고 자지 않은 덕분에 얼룩이 생겨 있다. 작은 한숨이 밀려온다. 염색을 하는 날에는 꼭 커버 위에 어두운색 수건을 깔고 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수건을 뚫고 이염이 된 건지, 수건을 아예 안 깐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럴 거면서 호텔식 침구를 고집하는 그가 못내 못마땅하다. 그런 정돈된 것들에는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깔려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하는 것인가를 잠시 언짢아하다가 이내 이게 뭐 대수인가 싶어 못 본 척을 한다.



'오늘은 졸지 말고 책을 읽어야지. 정신 차리고!!! 오늘은 눕지 않겠어.' 다짐은 어느새, 시골에서 병원 진료차 올라온 엄마와 모처럼 중요하고 바쁜 일정이 생긴 딸의 의무적 효도 서비스를 지켜보다 눈이 감기는 사태로 이어졌다. 추운 건 싫으니 전기장판과 이불 속을 택했지만, 오늘만큼은 눕지 않기로 했으니 잠을 쫓기 위해 SNS에 올릴 책의 구절을 정리한다. 재빠르게 이미지를 캡처하고, 텍스트를 복사해 캔바로 옮겨 저장한다. 그렇게 졸릴 때마다 잠을 깨기 위해 SNS를 활용한다.



아이가 오려면 한 시간이 남았다. 아직도 나는 <안녕이라 그랬어>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게으른 엄마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뜨뜻한 아랫목을 뒤로하고 안방 옆 화장실 문을 연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샤워기 물을 맞으며 머리를 감고 샤워를 마친다. 문득 앞서 SNS에 게시물을 올리다 본 쇼츠 영상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최민준 아들 연구소 대표의 영상이었다. DM으로 아들 학부모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는 그가 "아들에게 샤워하라고 했는데 왜 아들은 머리만 감고 나오고 세수는 하지 않는 것"인지 하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냥 아들들에게는 "머리 감고, 세수하고, 양치해"라고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대답이 이어졌다.



"어, 우리 딸인데?" 아들만 그런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며 스킨로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다. 지난 생일에 갖고 있던 상품권으로 나를 위한 선물을 사러 나간 백화점에서, 새로 산 볼 터치로 애써 밋밋한 얼굴에 화색이라도 돌게 해볼까 한다. 분명 백화점에서 시연을 해줬을 때는 상큼하고 산뜻했는데, 내가 하니 칙칙한 것 같고 영 돈이 아까운 생각만 들었다.



건강한 식사 생각에 사과를 깎아 예쁜 접시에 담았다. 접시 한 쪽에 레드 피넛버터를 한 숟가락 떠서 트렌드를 따라가 본다. 조금 전 SNS에서 본 레시피대로 두부에 계란, 자투리 야채들과 새우를 넣고 토마토 소소와섞어주었다. 몸에 좋은 두부를, 좋아하는 토마토소스에 섞으면 혹시나 먹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치즈를 듬뿍 올려 오븐에 들어갔다 나온 그라탕은 제법 훌륭해 보였다. 이탈리안 가정식 느낌이 물씬 난달까. 치즈가 노릇하게 익었고 그라탕 그릇과 맞닿은 치즈는 좀 더 브라운이 되어 바삭한 치즈도 맛볼 수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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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중문 닫는 것을 늘 잊는 딸에게 문 닫고 다니라고, 슬리퍼는 제자리에 두라고 잔소리를 한 번 더 하면서 눈치를 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표정과 마음에 장단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멜팅 된 치즈 아래 두부를 보며 아이의 눈 코 입이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찡그린 미간과 솟아오른 눈썹산을 보며 다시 한번 숨을 참는다. 맛있어, 먹어봐.



딸은 얼굴을 펴고 치즈와 새우, 소시지를 골라 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시리얼 볼에 첵스를 담고, 우유를 부어 한 그릇 먹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 더 참아낸다. <안녕이라 그랬어>속 은미는 엄마의 장례를 치렀다. 오랜 간병을 한 터라 장례를 마친 은미는 서글픔과 함께 후련함을 느꼈다고 했다. "내 딸로 와줘서,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하는 안녕과, "잘 지내. 우리 딸, 사랑해" 하는 안녕 사이에서 그저 오늘 하루의 안녕을 바라는 내가 대단히 뭐를 잘못한 것인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두부가 싫은 거겠지, 내가 싫은 건 아닐 거야. 방학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 바라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책 속에 코를 박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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